백희정, ‘알파걸’이 모든 여성 대변하지 않아
백희정, ‘알파걸’이 모든 여성 대변하지 않아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3.11.04 09: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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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친화도시 광주, 텃밭 일구는 여성일꾼들(3)

▲광주여성민우회 백희정 대표
우리나라도 이제 강한 여성상의 대명사 ‘알파걸’의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느낄 수 있다. 알파걸이란 모든 면에서 뛰어난 사회계층에 속하는 엘리트집단 여성을 지칭하는 단어다.

이처럼 현재 우리나라는 각종 국가고시에서 여성 합격자의 수는 점점 남자들을 따라잡고 있고, 외무고시 합격자는 이미 대다수가 여자들이 차지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광주 여성민우회 백희정(44) 대표는 알파걸이 부각되어 이슈화되는 것은 아직까지 우리 사회가 남성중심 사회라고 보여주는 반증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운동 접하기 전 평범한 생활 지내

바쁜 일정 탓에 서구청 근처에서 만나게 된 백 대표는 “사회 속에서 여성이 특별히 잘해내는 모습이 부각되어 이슈화되는 것은 아직도 남성중심사회가 남아있다는 것이다”며 “이제는 여성이 남성을 뛰어넘어 마치 역전됐다고 흔히 이야기를 하는데 소수의 몇몇 알파걸들이 대한민국의 평범한 여성들까지 대표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남성중심 사회일수록 여성이 두각을 나타내는 것이 잘 보일 뿐이라는 것이다.

백 대표는 지난 13년 동안 여성민우회 활동을 해왔다. 그녀가 하는 활동은 주로 성차별 해소를 넘어서 성주류화운동에 역점을 두고 있다. 지금까지 여성운동이나 정책들이 여성에게 특별한 대우를 하는 것은 오히려 차별하는 것으로 보고 성차별을 해소하는데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전남 강진에서 태어난 그녀는 유년시절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 자라왔다. 부모님은 부산에서 일을 하셨기에 강진에서 할머니와 지냈지만, 연로하신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가족이 다 함께 살게 됐다.

이후 초등학교 5학년 때 광주로 전학을 오게 되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남들처럼 평범한 학교생활을 지냈다. 그녀의 변화는 대학생활이 계기를 심어줬다.

1990년 조선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던 백 대표는 “그때는 정해놓은 전공이나 내가 어떻게 살아야하나 꿈도 없이 잘 모르는 상태에서 정치외교학과를 갔던 기억이 있다”며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로 대학생활을 시작했지만 학생회 활동으로 점점 사회 의식을 키워왔던 것 같다”고 말했다.

당시 학교 내 분위기는 운동권 중심의 데모를 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이미 88년부터 학내 민주화가 추진되면서 혼돈스러운 상황이었고 수업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학생회활동으로 트여진 사회의식

그런 현장에서 우연치 않게 사회과학대 여학생회를 접하게 되고 의식이 트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당시를 떠올리며 “당시 여학생 화장실에는 여학생회가 만든 ‘화장실 신문’이라고 화장실 문에 붙여 읽을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며 “선배의 권유로 어렸을 때 손재주가 뛰어났던 능력을 발휘해 사회과학대 여학생회에서 ‘화장실 신문’ 꾸미기에 동참하고 학생회 활동을 시작하게 됐다”고 떠올렸다.

화장실 신문의 주요 내용은 학교 상황들, 여성문제, 기지촌 여성들 문제, 성폭력 이슈 등 통념 깨기 식으로 정보를 실어 학생들에게 알리기 시작했다.

대학교 3학년 때는 총여학생회 활동을 하였고 홍보부 차장역을 맡아 조금 더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되기도 했다. 이후 그녀는 여학생 운동을 열심히 하다가 94년에 졸업을 하게 된다. 그러나 막상 사회에 덩그러니 나와보니 ‘무엇을 해야할까’라는 고민을 떨칠 수 없었다.

그래서 대학생활 때 줄곧 해왔던 학생회 경험으로 언론이나 기획하는 일을 좋아했던 터라 광주지역 모 일간지 언론사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하지만 백 대표는 기자생활을 하면서 회의감이 느껴지면서 1년 반 동안의 기자생활을 접게 됐다.

그 이유는 기자는 정의로운 사람이고 항상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펜으로 사회고발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과 달리 생각처럼 같지 않았던 것이다.

백 대표는 “당시 내가 생각하는 기자는 정의로운 사람이었지만 기자들도 나약하고, 참고 있는 경우가 많았으며 여기자에게 배치되는 분야는 문화·여성분야였기 때문에 사회부처럼 역동적이지도 않았다”며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독특한 여성들을 발굴해서 기사를 쓰는 것뿐 더 이상 내가 바라는 식이 아니라고 느껴졌다”고 털어놨다.

▲지난 2008년에 이곳으로 이전한 광주여성민우회는 그동안 같이 사무실을 쓰는 형태에서 단독건물로 민우회 사무실을 가질 수 있게 되어 '북동시대'를 열었다고 한다.
여성친화도시, 성주류화·성인지 정책 실현돼야

이후 여러 가지 일을 하다 지난 1998년 결혼을 하게 되면서 잠시 휴식 기간을 가졌다. 한편 휴식 기간동안 친구의 소개로 ‘광주여성회’ 알게 되면서 저녁시간을 쪼개 회원활동을 하게 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광주여성회를 전신으로 롯데백화점 부근 삼호회관에 지난 2000년 광주민우회가 설립됐다. 그녀가 초창기 민우회 활동하면서 7개월이 된 갓난아이가 있었던 터라 가장 관심이 쏠린 것은 ‘보육문제’였다. 보육문제에 접근함과 동시에 성교육부장이라는 직책을 맡게 됐다.

여성민우회의 부설기구 성폭력상담소는 상담 중심의 개인의 서비스를 넘어서 수많은 대중들을 만나기 위한 전략을 세우기도 했다. 그렇게 회원으로 시작해 책임을 맡게 되고 12년만인 지난 2012년에 여성민우회 대표로 여성활동의 사령탑을 쥐게 됐다.

그녀는 “지금은 여성민우회가 북동시대를 열었다”며 “그동안 여러 곳에 사무실을 거치면서 같이 건물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민우회의 단독건물을 얻어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처럼 백 대표는 설립 초창기에 발기인으로 활동하는 것부터 지금까지 민우회 역사의 현장에 있었다.

현재 광주여성민우회에서는 지방자치 여성정책에 대해 지속적으로 모니터링을 하고 있다. 지방자치 정책에서 의제를 발굴하고, 특히 성주류, 성인지 정착을 위한 활동을 해오고 있다.

앞으로 백 대표는 “후배 여성운동가들을 재양산해야 하고 활동가로써 정체성을 가질 수 있도록 앞으로 무수히 해결해야할 일들이 선배들의 역할이고, 지금 겪고 있는 가장 큰 문제다”며 “변화된 시점에서 어떻게 후배들을 참여시킬 것인가라는 현실적인 고민들이 있는데, 대학생들도 여성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고 기대했다./김다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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