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울게 하여라
혼자 울게 하여라
  • 문틈/시인
  • 승인 2013.10.30 07: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남자는 울어서는 안된다는 교육을 받고 살아왔다. 지금도 그런 말이 무슨 인생법칙처럼 떠돌아다닌다. 아무리 슬픈 일을 당해서도 울지 않고 의연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남자의 믿음직한 상표처럼 되어 있다. 거기에는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가부장 시대에는 가령 남편이 운다면 그 가솔들은 사기가 땅에 떨어져 주눅이 들고 말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은 다른 세상이다. 말하자면 울고 싶으면 울 수도 있는 세상이다. 아내가 남편의 뺨을 때리는 드라마가 날마다 나온다. 그런데도 남자가 우는 것에 별로 관대하지 않은 것이 우리 사회의 풍경이다.
‘눈물은 마음의 언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에 대입해 보면 울지 않는다는 것은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왜 남자는 속을 드러내면 안된다는 것인지, 나는 그런 말에 세뇌된 사람이다.
오래 전 일이다. 갑자기 나는 안과병원을 찾아갔다. 가만 생각해보니 대처에 나와 살면서 수 십년 동안 한 번도 울어본 기억이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혹시 안과 계통에 무슨 문제가 생겨서 그런 것이 아닐까.
의사에게 걱정스러운 말투로 내가 말했다. “눈물이 안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러자 60대 의사는 내게 느린 말투로 물었다. “무슨 울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의사는 눈을 아래로 보라, 위로 보라, 옆으로 보라, 그리고나서는 기계로 들여다보고 나더니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눈물샘에도 이상이 없구요.” 그때 처음 눈물샘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우는 남자는 패배자인가, 아니면 못난 남자인가, 혹시 바보 같은 남자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가 안과병원에 찾아갔던 그날은 도대체 나라는 인간이 어떻게 된 작자이길래 한 번도 울어본 적이 없이 독하게 이 세상을 살아왔는가, 오랫동안 울지 않아서 그만 안과 계통에 무슨 큰 고장이라도 생기지 않았는가, 걱정이 되어서였던 것 같다.
나는 남자는 울어서는 안된다는 케케묵은 교육을 그 날짜로 폐기처분했다. 그리고 슬픈 이야기를 듣기만 해도 눈물을 글썽인다. 남의 설움에 그대로 공감하는 것이다. 어떤 때는 지금껏 산전수전 겪으며 힘든 세상을 살아온 나 자신을 위해 어느 하루 날을 받아 실컷 울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하루 종일 어깨를 들먹이며 오직 나 자신을 위로하고 싶어진다. 어디 완도 바닷가나 명산 영산강 가에 앉아서 해 저물도록 홀로 울고 싶은 때가 있다.
눈물을 흘리면 내 주장이긴 하지만 마음의 청소가 된다고 믿는다. 눈물을 흘리면 나에게 야멸차게 대해온 세상이 다 용서가 된다고 믿는다. 그렇다고 헤프게 눈물을 흘리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정말 꼭 눈물샘에 눈물이 흘러넘치도록 눈물을 흘릴 일이 있으면 울라는 것이다. 어쩌면 동물 가운데 인간에게만 울 수 있는 귀한 능력(?)이 주어진 존재가 아닌가.
가곡 ‘성불사의 밤’에 나오는 그 맨 끝 가사에 ‘혼자 울게 하여라.’라는 대목이 떠오를 때마다 온몸이 떨리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사무쳐온다. 산사의 절 추녀에 매달린 풍경소리만 밤중 내내 울게 놓아두고 주승, 객은 잠들라는 거다.
그래, 천지간에 우는 것이 어디 사람뿐이랴. 삼라만상이 잠든 가을 밤 산골짜기에서는 산과일들이 떨어지고, 숲에서는 낙엽이 지고, 달은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데 외로운 산사에서는 뎅그렁, 바람이 지날 때마다 풍경소리만 그윽한 가을밤을 울어쌓는데. 우는 자에게 진정 복이 있어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