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를 한 알 주워 들고…
도토리를 한 알 주워 들고…
  • 문틈/시인
  • 승인 2013.10.17 0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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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이 마치 금가루처럼 반짝거리며 날아다닌다. 하늘은 초등학생이 쓰는 파란 색종이처럼 푸르다. 길에는 은행열매와 도토리들이 떨어져 있다. 누가 무슨 말을 안해도 무르익은 만추다. 가만히 집에 있질 못하겠다. 밖에서 누가 불러대는 것는 것도 아니건만 집안에 틀어박혀 있으면 왠지 손해보는 것만 같다.
이렇게 나를 밖으로 불러내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다가서기만 하면 두 팔 벌려 나를 보듬어줄 것 같은 가을이다. 가을의 공기는 다른 계절의 공기 성분과는 다르다는 설도 있다. 그 마약 같은 다른 성분이 내 감정을 끌어내 자꾸만 밖으로 불러내는지도 모른다.
너도나도 입만 열면 ‘힐링’이 대유행이지만 다 소용없는 짓거리다. 책이, 음식이, 휴식이, 누구의 강연이 힐링을 가져다 준다고? 원, 별 말씀. 내 주장은 가을이다. 가을과 동행하여 산길이든 신작로든 그 속으로 걸어가 보라.
철로가에 하늘거리는 가녀린 코스모스들, 저녁 서쪽 하늘로 날아가는 새떼, 잎새를 다 떨구고 붉게 물든 계절을 불 밝혀든 감나무 가지에 달린 등불 같은 감들, 그리고 들판에 황금빛으로 익은 벼이삭들, 바다로 가는 여윈 강물,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 모든 가을의 풍경이 마음을 안아 준다.
누구는 가을 햇빛이 보약이라고 하는데 나는 가을이 단방약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데 가을은 너무나 짧다. 가을인가 싶으면 금방 겨울이 성큼 들이닥친다. 그것이 나로서는 유감천만이다. 그러니 가을이 우리 곁에 잠시 머무는 동안 가능한 한 최대한 즐겨야 한다. 그것이 힐링이다. 나는 가을의 도처에서 신(神)을 느낀다. 단풍, 낙엽, 밤별, 가을비, 보름달, 추수가 끝난 논… 맑은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는 신이 거기 있다.
길바닥에서 도토리 한 알을 주워들고 하늘을 쳐다본다. 모르긴 해도 껍질에 에나멜을 칠한 듯한 이 잘 영근 도토리는 자연의 메시시가 저장되어 있는 유에스비(usb)라고 생각는다. 도토리를 어느 컴퓨터에 꽂고 화면을 들여다본다면 필경 폭염과 태풍과 서리 같은 도토리의 내력은 물론이려니와 자연의 삭제되지 않은 비밀 기록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어디 도토리만이랴. 가을의 열매들은 그 안에 다 몇 테라바이트의 비밀 기록이 저장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 작은 열매가 몇 십미터나 되는 상수리나무나 은행나무를 내부에 품고 있는 것이리라.
해남이 낳은 불세출의 시인 박성룡은 ‘과목’이라는 시에서 ‘모든 것이 멸렬(滅裂)하는 가을을 가려 그는 홀로/황홀한 빛깔과 무게의 은총을 지니게 되는//과목에 과물(果物)들이 무르익어 있는 사태처럼/나를 경악케 하는 것은 없다.’고 가을을 상찬한다.
가을은 모든 것이 활홀한 빛깔과 무게의 은총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중년 장년 고개를 넘어 70이 될까 말까한 주름진 얼굴에서도 그런 내력을 본다. 설령 그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이더라도 그의 인생은 은총을 지닌 내력을 지니고 있다.
틱 낫 한 스님은 “우리는 걸음을 내딛는 매 순간 목적지에 도착하고 있다.”고 말한다. 도토리와 은행열매가 툭, 하고 낙하할 때 자연은 이윽고 그것들의 목적지에 내려놓는 것이다. 나 또한 그렇다고 믿는다.
가을이 “너 참 고생 많았다.”며 나를 안아주는 이 순간, 나는 작은 도토리가 된다. 바오밥나무가 전 우주를 축소한 나무이듯 내 안에 커다란 상수리나무 한 그루가 들어서 있음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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