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여성운동사40> 5월, 말 없는 자들의 잊지 못할 서러운 그날(2)
<광주전남여성운동사40> 5월, 말 없는 자들의 잊지 못할 서러운 그날(2)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3.09.26 09: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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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이름, 5월의 아름다운 신부 최미애

제법 날씨가 쌀쌀해졌다. 눈 깜짝할 새 성큼 다가온 가을 날씨가 지나온 33년의 세월에 견줄 순 없지만 점점 아무일 없다는 듯이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듯하다.

국립 5.18민주묘지에는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영정사진이 눈에 확 들어온다. 묘지번호 1-60를 달고 차가운 땅속에 묻히게 된 사연이 궁금하다.

주위에 있는 다른 5.18 민주영령들의 영정사진과 비교해서 이 영정사진은 유독 새신부의 곱고 아름다운 자태를 간직한 채 생을 마감한 것 같은 느낌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갓난 아이 두고 행복한 신혼생활

이 영정사진의 주인은 최미애(당시 23세)씨다. 그녀는 1957년 2월 6일에 태어나 80년에는 조선대학교 간호학과에 재학중이었다. 최 씨는 집안의 친척의 소개로 전남고등학교 영어교사로 근무하는 김충희씨를 만나 결혼을 한 상태였다.

그 부부 내외는 전남대 부근에서 신혼살림을 차리고, 돌이 지나지 않은 갓난아이가 있었다. 최미애씨의 뱃속엔 두 번째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임신 8개월에 만삭의 몸으로 출산을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계엄령 선포로 인해 광주는 쑥대밭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전남대학교 학생들을 주축으로 시작해 수많은 광주 시민들이 참여한 5.18민주화항쟁을 맞이하게 됐다.

당시 학교도 휴교령이 떨어진 상태에 학생들은 이 사태를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고, 광주의 시가지에는 대학생이 발견되기만 하면 무자비하게 구타를 일삼던 계엄군이 가득했다.

1980년 5월 18일로 전남대 주변에 수많은 계엄군들이 깔렸고, 시민군과 학생들은 투석전을 벌이며 군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전남대 주변 시민들은 하루하루를 불안에 떨어야 했다.

연령에 관계없이 어린 나이의 고등학생들도 민주화운동에 동참했다. 전남고에 근무하던 최미애씨의 남편은 제자들이 시위에 나서고 있다면서 휴교령 상태인 학교에 나갔고 점심이 지나도 소식도 없이 돌아오지 않자 최미애씨는 집앞에 마중을 나가게 된다.

남편 기다리다 계엄군 총탄 맞아

바깥에는 여전히 시위대와 계엄군의 교전이 한창이었다. 만삭이었던 최미애씨가 마중을 나갔던 순간에는 계엄군이 시위대를 향해 M16을 발포했다. 계엄군이 쏜 총알은 남편을 기다리던 그녀에게 조준이 되어 그 자리에서 쓰러지게 했다.

계엄군의 총탄에 바로 즉사한 것이었다. 계엄군이 고의적인 사격을 가해 정확히 머리에 조준해 맞춘 것이었다.

최미애씨의 어머니 김현녀씨는 당시를 떠올리며 “미애가 총에 맞았다는 소리를 듣고 눈앞이 캄캄해지고 정신이 아득해졌었다”며 “딸이 쓰러져 있는 곳을 찾아 갔지만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되어 피가 흥건했고, 처참하게 깨진 두개골 사이에서 뇌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고 가슴 아픈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뿐이 아니었다. 딸의 몸은 차갑게 식어가고 있는데, 불룩하게 만삭이었던 미애의 배에서 8개월이 된 태아는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내비추려는 듯 거세게 발길질을 치는 게 느껴졌다고 한다.

김현녀씨는 “급하게 주변의 사람들과 함께 병원에 연락을 취해보고, 응급차를 요청했지만 소용없었고 30분을 넘게 요동치던 태아의 몸부림은 결국 미동이 끊기자 딸을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은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만삭 상태로 숨 거둬 안타까움 커져

그렇게 최미애씨의 시신을 수습해 가까스로 장례를 치르고 찢겨진 가슴을 추스르는데 힘겨운 하루하루를 보내야했다.

한편 임산부였던 딸이 죽고 난 뒤엔 해괴망측한 ‘유언비어’가 돌기 시작했다. “계엄군이 임산부를 죽였대, 계엄군이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꺼냈데”라는 소문이 돌자 계엄군은 유언비어 진상조사를 하겠다는 명분으로 땅속에 묻은 딸의 주검을 다시 파오라고 명령했다.

최 씨의 어머니 김현녀씨는 “거부하면 ‘유언비어 날포죄’로 집어넣겠다는 협박을 받기도 하고, 시신을 파내지 않으면 영원히 오해를 사고 살 것이라는 협박에 당국에서 시키는 것을 거부할 수 없었다”고 한다.

결국 18일 만에 다시 파헤쳐진 딸의 주검은 조선대병원에서 검시를 마친 뒤 비통한 마음과 함께 망월동에 안장하게 됐다. 이후 김현녀씨는 홀로 남은 사위를 위해 직접 중매를 서서 장가를 보냈다.

그리고 남겨진 김현녀씨와 최미애씨의 아버지는 병이 났다. 이후 아버지는 고혈압으로 줄곧 고생을 했다고 한다.

어머니 김현녀씨는 ‘광주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지난 1988년에는 국회 5공화국특별위원회 ‘광주청문회’에 나와 딸과 손자를 한꺼번에 잃은 ‘애끊는 눈물의 한’을 쏟아내기도 했다.

“우리 딸이 임신을 해갖고 총에 맞았는디, 죽은 사람은 있는디 왜 죽인 사람은 없는 것이오? 세상에 나와 보도 못하고 죽은 내 손자는 어쩔 것이냔 말이오? 세상에 임신한 사람인 줄 뻔히 알면서도 총을 쏘는 그런 짐승 같은 놈들이 어딨냔 말이오? 뭔 죄가 있어서, 뭔 죄를 지었다고 총을 쏴서….”

김 씨는 진실을 이제서라도 말할 수 있게 돼서 후련했지만 청문회의 증언으로 김현녀씨의 남편은 직장으로부터 ‘온전치 못할 것이다’는 협박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이처럼 5월 유가족들의 한은 풀리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더해갔다. 결국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고 최미애씨의 보상금이 나왔지만 이마저도 사위에게 받아가도록 했다. 딸과 손자를 동시에 잃은 아픔은 씻을 수 없이 그대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덧 팔순을 훌쩍 넘긴 김현녀씨는 현재 남편의 건강악화로 순천으로 내려가 병간호를 하고 있다. 이미 33년 전 애지중지한 딸을 잃은 어머니 김현녀씨는 남편마저 위독한 상태에 처하자 지친 기색이 영력한 목소리였다.

더 이상 33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던 김현녀씨는 “이제 눈을 감은 딸과 살고자 발버둥 쳤던 그 어린 손자의 넋이 편히 잠들기만을 바랄 뿐이다”고 마지막 남은 염원을 빌어본다.

이렇듯 수많은 여성 민주운동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망에 이른 여성 희생자들은 아직까지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여성 희생자가 빛을 발할 수 있도록 기대해본다./김다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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