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여성운동사39> 5월, 말 없는 자들의 잊지 못할 서러운 그날(1)
<광주전남여성운동사39> 5월, 말 없는 자들의 잊지 못할 서러운 그날(1)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3.09.11 22: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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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혈보다 더 많이 흘린 피로 ‘눈을 감은 금희’

풍성한 한가위를 맞이하여 사람들은 고향을 찾아 귀성길에 몸을 실고 있다. 온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송편을 빚고, 하늘나라로 먼저 가신 집안어른에게 인사를 하기위해 성묘를 나서는 가정도 눈만 돌리면 볼 수 있다.

우리민족은 풍요로운 추석을 맞이하여 그동안 시간적 제약으로 만나기 힘들었던 반가운 친인척들의 얼굴을 보고, 근황을 물으며 훈훈한 명절 보내기에 여념이 없다.

하지만 80년 5월에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은 온 가족이 모이는 명절이 반갑지만은 않은 듯 슬픔에 잠겨있다.

5·18민주화운동, 광주 여성운동의 시발점

80년 민주화를 얻어내기 위해 ‘계엄령을 철회하라’를 외치던 광주 시민들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계엄군의 만행에 대항하기 위해 길거리로 나섰다. 전국은 계엄 선포가 내려지고 학교는 휴교했지만, 광주 시민들은 이대로 끝까지 지켜볼 수 없었다.

작전명 ‘화려한 휴가’가 선포된 이후 80년 5월 21일. 계엄군의 집단발포로 무고한 시민 사망자들 대거 발생했다. 계엄군들은 군화발로 시민군들을 처참히 짓밟고 무자비로 학살했다. 그 당시 민주화 운동 관련자는 여성을 포함해 총 4,300여명에 이르렀으며 살아남은 자, 죽은 자로 나뉘어 어느덧 30년이 훌쩍 지나고 있다.

이후 광주 여성들은 80년 5월을 겪으며 여성운동의 커다란 획을 긋고 이들이 중심축을 이루며 공식적인 여성사회단체를 설립하기 시작했다.

물론 80년을 겪은 광주 여성들은 계엄군과 직접적으로 맞서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계엄군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가두방송을 하고 주먹밥과 물 운반, 계엄군의 눈을 피해 투사회보 제작, 헌혈동참운동 등 열화와 같은 민주화 운동에 동참했지만 살아남아 있다는 사실이 죄스럽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번 회에서는 그동안 저 세상으로 먼저 떠나 말을 할 수 없었던 5.18관련 여성 사망자들을 집중 조명하려고 한다. 숭고한 이들은 현재 망월동 5.18묘지와 국립 5.18민주묘지에 잠들어 있다.

5.18민주화 운동에 가담한 광주 여성들은 200여명 가까이 됐다. 하지만 박관현, 윤상원 등 남성 민주화 열사들은 죽은 이후에도 집중 관심을 받고 있지만, 수많은 여성 민주운동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망에 이른 여성 희생자들은 아직까지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

셀 수 없이 수많은 여성 희생자 발생

▲박금희양(사망당시 18세)
민주화 운동에 가담한 여성 200여 명 중 총상으로 인한 여성 부상자 43명, 자상으로 인한 여성 부상자 3명, 5.18 기간 부상 후유증으로 인한 여성 사망자 18명이 있다.

또한 5.18을 겪고 나서 정신질환 여성 환자는 11명, 5월 27일 계엄군 진압당시 도청 내 여성 시민군 7명, 아직까지 행방불명이 된 여성은 13명으로 집계되고 있다.(5.18기념재단 통계 참고)

이 중 18살 꽃다운 나이에 계엄군의 총탄에 억울함을 호소하지 못한채 생을 마감한 소녀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박금희다. 그녀는 1963년 7월 13일 농성동에서 태어나 4남 4녀 중 막내였다. 하지만 그녀는 형제가 많은 탓에 가난으로 형편이 어려운 상황에서 응석부리는 막내로 자라오지 못했다.

그녀의 어머니 故문귀덕씨는 “금희는 차비가 없어 한 시간이나 되는 거리를 걸어서 학교에 가기도 했고, 도시락도 못 챙겨간 형편이었던 게 너무 죄스럽다”며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었지만 금희는 영특하고 몸도 마음도 건강한 아이라 학교 성적도 좋고, 선도 부장을 맡을 만큼 책임감 있고, 적극적인 성격을 지닌 아이었다”고 증언한다.

그렇게 금희네 집은 바람이나 겨우 막을 수 있을 것 같은 볏짚과 흙으로 만든 곳에서 셋방살이를 했으며, 집 부근 공터에서 오이, 호박 등 채소를 가꾸어 열 식구가 근근이 살아갔다고 한다.

그러던 도중 전남여상 3학년에 재학중이이었던 금희는 5.18을 맞이하게 됐다. 평소에 어른스러운 성격을 지녔던 금희는 5월 21일 영영 가족 곁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됐다.

시민군 따라 헌혈 한 후 안타까운 죽음

그날 아침에 금희는 집안 청소며, 빨래까지 다 마치고 어머니와 함께 밥을 먹고 집을 나섰다. 21일은 시험인 탓에 오빠의 시계를 차고서 시험을 보러 학교에 갔다. 하지만 어머니 문귀덕씨는 시험이 끝났을 금희를 밤늦게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았다.

금희의 어머니 故문귀덕씨는 “밖에서 들리는 총소리에 숨이 멎는 듯 놀란 가슴 속에서도 그저 막내딸 금희가 살아있게만 해달라 하늘에 기도했다”며 “다음날 학교 선생님들과 함께 도청으로 향했지만 돌아온 것은 금희의 사망소식이었다”고 떠올린다.

21일 오전이 마지막으로 살아있는 금희 얼굴을 본 날이 된 것이다. 사망자 명단에는 ‘김금희’로 되어 있었지만 싸늘한 시신의 손목에 찬 시계며, 숨도 안 쉬고 누워있는 아이가 막내딸 ‘박금희’였다고 한다.

전남여상에 다니던 금희는 사망 당일 시험이 끝난 후 오후 5시 경. 헌혈 받은 피를 실은 기독병원 응급차를 목격했던 것이다. 책임감이 남달랐던 금희는 차를 가로막고 “저도 헌혈하러 가는 길인데 병원으로 함께 갈래요”라는 말을 했다.

기독교병원에는 계엄군의 만행에 눈에 담기도 힘든 부상자들이 줄지어 있었고, 피가 모자라 헌혈이 급한 상황이었다.

금희는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을 다치게 했을까? 내가 헌혈을 해서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구해야 겠어”라는 생각을 갖고 헌혈을 시작했다. 작고 여리던 소녀였던 금희가 헌혈을 마치고 기독교 병원 문을 나가는 순간 상공에서는 헬기를 탄 계엄군들이 총을 겨누기 시작했다.

“오메 어찌끄나 애기가 총에 맞았다. 오메 내장이 다 보일라 하그만. 머리랑 배에 총을 맞어부러써.”

뿌듯한 마음으로 돌아서던 밝은 미소를 가진 금희는 그대로 꼬꾸라진 채 일어나지 못했다. 계엄군이 헬기에서 쏜 총에 머리와 배를 맞아 관통하고, 비명소리도 없이 그 자리에서 사망하게 된 것이다.

▲80년 5.18당시 김녕만 사진기자가 찍은 박금희 양의 관을 안고 통곡하는 어머니

80년 5월, 여성 희생자 재조명 받아야

금희의 시신은 기독교 병원에서 도청으로 옮겨지고, 상무관으로 옮겨지면서 그녀의 어머니는 말도 못하는 억울함에 싸늘한 금희 곁을 지켜야 했다.

5월 27일 계엄군의 도청진압 이후 상황은 종료 되었지만 억울하게 다치고 죽은 수많은 유족들은 제사마저도 숨어서 지냈다.

박금희 어머니 故문귀덕씨의 증언에 따르면 “87년까지 매년 5월 21일이 되면 친구들은 금희가 누워있는 묘지 가까운 산 속에서 경찰들 눈을 피해 숨어서 생일파티를 해줘야 했다”고 한다.

이후 故문귀덕씨는 “‘금희의 오월이라는 연극, '우리 언니, 박금희' 라는 연극이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이제는 이름도 잊혀져간다”며 “어떤 것도 사죄 받지 못했는데 어떻게 잊을 수가 있단 말인가 싶다”고 회상했다.

또한 문 씨는 살아생전 “너무 늙어서 이제는 힘도 없다”며 “언제 죽을랑가 모르겠지만 금희가 보고자퍼 죽겠다”고 증언을 한바 있다.

이렇듯 80년대와 비해 경제, 사회, 정치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여성의 입지가 남성과 동등해지고 있는 가운데 5.18민주화운동 당시 여성 희생자의 활약상도 재조명 받을 수 있도록 관련 단체, 관련 재단에서 심층적인 조사·연구·발굴이 필요할 때다./김다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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