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난민촌 현지를 가다 3>Zaatari refugee camp 서글픈 이야기들
<시리아난민촌 현지를 가다 3>Zaatari refugee camp 서글픈 이야기들
  • 박재완 시민기자
  • 승인 2013.09.04 16: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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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그리고 광주를 연상시키는 시리아 민주화운동

‘Champs Elysees'(샹-제리제)에서 그들이 꿈꾸는 평화‚ '살람 알라이쿰‘(Salaam Alaykum)의 의미가 그대로 찾아오기를 기도한다.
여자 혼자 몸으로 8남매를 키우고 있는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눈동자만 내놓은 검정색의 니카브(Niqab)를 (얼굴을 가리는 베일로 눈만 보이도록 되어 있다) 하고 다니는 그녀(이름을 알려 주지 않았다)가 유일한 낙은 터키 물 담배를 피우는 것이다. 나는 왜 그녀가 독한 물 담배를 피우는 이유를 그녀와 이야기 하면서 알았고, 그리고 이해를 하게 되었다.
시리아 내전이 있기 전에는 평범한 노동과 농사를 지으면서 아들 딸 낳고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가정을 일구며 잘 살았다. 그러나 시리아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시리아국경지대 남부 다라야(Daraa)지역은 민주화 운동의 발상지인 광주처럼 정부군에 의하여 철저하게 최후의 항쟁지로 참혹한 암흑의 도시가 되어버려 학살당한 시신이 널브러진 곳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학살 공포에 질려

그녀의 가족들은 그냥 다라야 인근에 살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정부군에 의해 참혹한 죽임을 당했단다. 그 참혹함은 어찌 표현을 해야 할 지가 난감하다. 어린 자식까지 보는데서 아비의 목이 잘려 나간 것이다.
체포도, 구금도 없이 그냥 집에 들이 닥친 군인들은 아무런 형식도 없이 그녀의 가족이 보는데서 효수를 한 것이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나. 중동에서는 이런 형벌이 아무런 죄의식 없이 행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기자는 그녀 외에도 또 다른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마을 앞마당에서 멀쩡하게 살아있는 시리아 민간인을 잡아서 기계톱으로 몸뚱이를 잘라버린 것을 목격했다고, 이웃에 사는 남자는 증언했다. 그는 담배를 연신 피워대는 모습이 공포에 잔뜩 질려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잔인하게 학살한 군인들의 눈은 충혈되어 있으며, 약물에 도취되어 있는 것처럼 멍한 모습이 악귀의 모습이었으며, 난민들의 증언은 차마 입으로 옮기기조차 민망한 숫한 사연을 토해낸다.
그녀가 현장을 회상하며 치를 떠는 모습은 차마 볼 수가 없었다. 내가 괜한 질문을 한 것 같아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온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연신 물 담배를 피워댄다.
그녀는 유엔난민기구에서 제공되는 월 40만 원 정도로 생활을 하는데 맨 땅바닥에 허름한 카펫을 깔고 생활을 한다, 빵조각에 의지하며 생활을 하는데 생활하는데 난민 신분이라서 아무 것도 부업을 할 수 없고 오직 난민기구에서 주는 몇 푼 안 되는 식생활 쿠폰에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

폭등하는 물가에 어린 여자들 팔려나가

그래서 그들의 삶은 더욱 옹색할 수밖에 없다. 그녀의 꼬맹이들은 그 흔한 발가락 끼는 슬리퍼조차 살 돈이 없어 맨발로 다닌다. 그들이 설상 난민촌을 나가 인근 도회지로 간다고 해도 이미 몇 배가 올라버린 생활비에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요르단의 공식적인 실업률은 13%인데 실제로는 30%가 된다고 한다. 그런데다 부존자원이 없는 나라여서 모든 것을 수입에 의존한다. 요르단은 재정적자와 높은 실업률, 물가상승률에 허덕인다.
요르단 중동국가지만 석유 한 방울 나오지 않는 나라여서 유가가 리터당 1.113달러로 2010년에 비해 40%나 급등하여 고통을 받고 있고, 그리고 세계 5대 물부족 국가 중의 하나이다. 이런 와중에 시리아 내전으로 수십만 명의 난민들이 요르단으로 몰려와서 2012년 7월 자타리 난민캠프가 생기고, 일 년 만에 요르단에서 5번째로 큰 신흥 천막촌 도시가 생겨 버렸다.
이런 악순환 속에서 물가는 폭등하고, 집세는 폭등하고 있다. 그리고 시리아 난민이 유입이 되면서 노동력이 늘어나다 보니 도리어 임금이 떨어져 요르단인들의 눈총을 받고 있다.
이런 북새통에도 중동의 돈 있는 졸부(猝富)들이 난민촌에 들어와서 시리아의 나이 어린 여인들을 부모와 협의하여 거래를 한다. 중동의 일부다처(一夫多妻)제도 때문이다. 그것도 20살 미만의 여자아이를 사가는 데 심지어 12살 어린 꼬맹이도 거래가 되고 있다. 특히 난민촌에서 조직적으로 여성 난민들을 대상으로 심심치 않게 성범죄가 발생해 부모들은 불안케 한다.
시리아 정부군들이 침투하여 불안감 조성을 위해 조직적인 내부 분열을 만들려고 사건을 만들고 있다고 귀띔하기도 한다.

풍족한 문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 만들어야

제법 찬바람이 아침저녁으로 불어온다, 아마도 난민촌도 역시 쌀쌀할 것이다. 그곳도 겨울은 있다. 우리처럼 매서운 북풍한설은 아니지만 그곳도 산간지대는 폭설도 오고 그런다. 그들이 올 겨울 어찌 지낼까 걱정이다.
맨 바닥에 한기를 어찌 막으며, 더군다나 10월부터는 우기이다. 사막의 빗속에서 축축한 땅바닥에서 꼬맹이들이 맨발로 어찌 지낼까 걱정이 된다. 우리의 풍족한 문화가 그들에게 조금만 나눔이 된다면 헌 옷가지, 헌 신발이라도 보내고 싶은 심정이다.
기자는 한국전쟁 전후 세대로 자라오면서 부모님과 친인척에게 전쟁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다. 그리고 광주민주화운동이 군부에 의해 자행된 학살의 현장을 지켜봤다. 그리고 또 시리아 난민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들이 설치고 다닌다. 아니 그들이 지배를 하고 있다. 슬픈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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