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난민촌 현지를 가다1>절박한 미래를 안고사는 15만명의 시리아 난민
<시리아난민촌 현지를 가다1>절박한 미래를 안고사는 15만명의 시리아 난민
  • 박재완 시민기자
  • 승인 2013.08.22 14: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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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단-시리아국경에서 하루하루 태양과 싸우며 살아가는 이들

요르단과 시리아 국경지대에는 약 15만명이 좁은 곳에서 생활하고 있는 시리아난민촌이 있다. <시민의소리> 박재완 시민기자가 지난 9일부터 21일까지 이곳을 방문해 난민촌의 삶을 취재하고 돌아왔다. 중동의 새로운 선진국가로 부상하고 있는 요르단의 경제발전과 난민촌 이야기를 통해 지구촌의 다른 모습들을 5회에 걸쳐 조명해본다./편집자주

영화 속에서 볼 수 있었던 시리아 난민촌을 직접 찾아가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뜨거운 태양, 광활한 모래사막으로 상징되는 난민촌은 천막의 행렬과 철조망으로 갇혀진 수용소 같았다. 자타리 난민 캠프는 시리아 내전을 피해 도망온 난민들을 수용하려고 만들어졌다. 수용 규모는 6만명이지만, 그 세 배 가까운 15만명이 생활할 정도로 열악한 곳이었다.
지난 9일부터 21일까지 이곳을 광주지역의 봉사단체와 함께 찾아갔다. 첫인상은 인간으로서 이렇게 절박하게 살아간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6시간의 시차와 이곳 보다 더 따가운 햇볕을 지닌 중동에서 약 2주정도 강행군하다가 돌아왔다. 첫날 혼자서 인천공항에서 하루에 한 번 있는 대한항공을 타고 출발 아랍에미레이트 두바이 공항에 현지 시간으로 오후 6시에 내려 다음날 오후 2시에 있는 요르단 암만 공항으로 가기 위해 19시간을 노숙자 생활을 한다.

공항에서도 하루 5번 아잔 크게 울려

아랍에미레이트는 무비자여서 두바이 공항에서 시내를 관광할 수 있지만, 안내소에가 알아보니 150~200불 정도면 다음날 요르단으로 가는 데는 지장이 없다. 두바이 시내를 구경하고, 게스트 하우스에서 자고 올 수 있으나, 200불이면 요르단에서 1주일 살 수 있는 비용이다. 그래서 공항에서 노숙하기로 했다.
중동의 관문 두바이 공항은 40여개의 섬들을 엮여 인공도시로 만들었다고 한다, 석유장사로 번 돈으로 꾸민 도시이다. 공항은 무척 크다, 1~3번 터미널로 구성 되어 있으며, 지하철이 공항청사를 다니고, 각 청사마다 특색 있게 구성되어 있었다.
제 2터미널은 인근 국가를 다닌 듯 했고, 1,3번 청사는 원거리 여행객이 다닌 듯 보였다. 중동의 관문처럼 먹거리도 풍부하여 여러 나라 음식을 맛 볼 수 있었다. 이슬람 국가답게 공항 곳곳에 남녀가 따로 쓰는 기도실이 곳곳에 있어 이슬람 국가 답다. 하루에 5번 있는 아잔의 소리도 시간에 맞추어 공항이 울리도록 큰 소리로 울려 퍼진다.
이곳 공항에도 경제대국의 미국의 시장이 토종시장보다 더 많게 있다. 커피와 햄거버이며, 또 하나 놀란 것이 아니라, 헉! 소리가 날 정도다. 다른 나라에 없는 Smoking Lounge시설이 담배회사 이름을 걸고 있어 이것은 부자논리의 횡포 같이 보인다. 먹거리, 즐길거리, 볼거리가 많았던 두바이공항의 첫 인상이었다.
두바이 공항을 이륙한 비행기는 걸프(Gulf)만을 지나 사우디 사막을 통과 하는데 비경들이 내려다보인다. 한참동안 눈을 사막에 두고 보니 자연스레 황홀경에 빠진다. 붉은 빛의 모래사막의 도로가 그렇게 아름답게 보인다. 언제가 기회가 되면 저 길을 달려보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기독교 성지와 이슬람 문화의 성지가 교차되는 곳

요르단 정식 국명은 ‘요르단 하심 왕국(Hashemite Kingdom of Jordan)’이다. 우리나라와 직항노선은 없고 두바이 등에서 갈아타야 한다, 수도는 암만(Amman)이며, 고대성서 아몬(Ammon)시로 구약시대부터 있던 도시이다. 총 인구 650 여만 명 중 200만이 살고 있는 도시지만, 10여개의 골짜기로 이루어진 산악형 사암지대의 지형 구조여서 교통발달에 제약이 되고 있다.
그래도 암만은 중동지역에서 이곳으로 휴가를 오며, 일부 아랍의 부호들이 이곳에다 별장을 짓고 한 여름을 이곳에서 보낸다.
성서시대에 요르단은 Gilead, Ammon, Moab, Edom 및 이스라엘 일부 지역을 형성했던 서부지역으로 구성되었다. 중동지역은 보편적으로 성서에 기록된 역사의 도시가 대부분이지만, 그중 요르단에만 성서와 연관관 성지가 100여 군데가 넘을 정도의 역사적인 배경을 형성하고 있다.
BC 6세기에 셈계(Semitic)의 나바틴의 아랍부족이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남부 페트라(Petra)에 왕국을 세워 수도를 삼았다. 북부의 절반 정도가 시리아에 병합되었을 때인 BC 4~3세기 동안, 독립이 유지되었다. 역사적으로 요르단강 서쪽에 위치한 지역은 바빌로니아인, 페르시아인, 그리스인, 로마인, 아랍인 및 터키인에 의해 정복되었던 지역으로 아프리카, 중동, 유럽을 이어지는 교두보 지역이다.
6세기경에는 이슬람 제국의 지배를 받아, 많은 기독교문화의 성당과 교회가 완전하게 지하에 묻힌 것 같은 같은 느낌이 온다. 그리고 16세기에는 오스만 제국의 속령 시리아의 일부가 되어 이슬람문화의 확장 권에 들어간다. 그래서 그런지 기독교 성지와 이슬람 문화의 성지가 교차되고 있다.
근세에 들어와 1916년 영국이 ‘사이크스-피코’ 협정에 따라 요르단강 서안 및 동안 지역의 위임 통치권 장악하면서, 1917년에 영국이 터키로부터 모든 지역을 장악한다. 그리고 1921년에 요르단강 서안 지역이 서안의 팔레스타인과 분리했다.

미국문화 받아들인 중동국가

영국은 아랍의 지배자 Hejaz의 아들 Abdullah를 Palestine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Transjordan의 통치자로 인정-현재의 요르단 왕국 성립(압둘라가 왕으로 즉위)이 이루어지다가, 1946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으며 1948년의 제1차 아랍-이스라엘 전쟁에서 요르단은 West bank와 East Jerusalem을 점령, 팔레스타인 난민 유입되었다.
1949년에 요르단 하심 왕국(Hashimite Kingdom of Jordan)으로 국호 변경, 1952년에 압둘라의 손자 훗세인(Hussein) 1세가 왕위 계승하였다. 1967년에 제3차 중동전쟁인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West Bank(요르단강 서안(西岸)지역)을 점령하게 된다.
1974년에는 요르단은 PLO를 West Bank 거주민들의 유일한 합법적인 대표로써 인정, 아랍정상회담에서 서안지역에 대한 지배권 포기, 이스라엘과 완전한 평화조약에 서명함으로써 요르단 왕은 평화과정에 있어서 놀랍게도 재빨리 이스라엘과 교섭함으로써 요르단과 세계적 교류를 수용했다.
중동에서 미국의 가장 강력한 동맹국이 사우디아라비아와 요르단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왕정국가 이지만, 사우디아라비아는 아직 여자가 운전을 하지 못할 정도의 이슬람주의에 비민주적 요소가 많다. 그러나 요르단은 중동에서 가장 개방적이고 민주적이고 치안이 잘 유지된 데다 국왕이 국민들 대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고 영국, 미국 등에서 교육을 받아 미국입장에서는 매우 중요한 나라가 아닐 수 없다.
요르단은 92,300㎢ 면적에, 아랍 98%중 약 60%가 팔레스타인계이며, 체르케스인, 아르메니아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언어는 아랍어 98%를 사용하기 때문에 시내 돌아다니며 관광하기에 불편한 점은 있지만 그래도 영어를 광범위하게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어 그렇게 불편 하지는 않았다.
인간의 심리 상태는 참으로 요사(妖邪) 한가 보다, 21일 오후에 귀국하였다, 심야의 무더위에 끙끙대다 새벽 4시면 어김없이 울려 퍼지는 모스크의 아잔 소리가 그렇게 새벽을 힘들게 하더니, 오늘 아침에는 다시 듣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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