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단상 ⑮ 법정 미스테리
5월 단상 ⑮ 법정 미스테리
  • 김상집
  • 승인 2013.08.22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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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집

6월말 경 황 수사관이 나가면 뭐 할 거냐고 물었다. 당시에는 대체로 1차 조서가 마무리되고 있어서 내란주요임무종사자와 부화뇌동, 훈방 등이 분류되고 있었다. 나는 1980년 5월 1일 육군병장으로 제대하여 5월 6일부터 전남방직에서 일하다 큰형(김상윤)이 예비검속되면서 5월 18일부터 녹두서점에 있었다.
전대스쿨버스 운전과 가두방송 궐기대회 등은 윤상원의 지시에 의한 것으로 미뤄져 있어서 아마 잘하면 훈방될 수도 있는 모양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예비검속되었던 큰형(김상윤) 등 복적생들은 별다른 조서를 받지 않고 있었고 무장봉기 현장에도 없었기 때문에 계엄포고령 위반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반면에 형수님(정현애)은 YWCA 대자보팀을 지휘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대자보 문안을 기안했기 때문에 내란주요임무종사자로 분류되어 있었다. 나는 능청스럽게 “제가 왜 나갑니까? 형수(정현애 시의원)께서 먼저 나가셔야죠.”하고 대답했다. 황 수사관은 흘낏 내 눈치를 보더니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떴다.
나중에 들어보니 그날 밤 수사관들이 녹두서점 식구들 문제로 회의를 했다고 한다. 큰형(김상윤)은 예비검속되고 형수(정현애 시의원)와 형수 동생(정현순 목사)은 광산경찰서에 수감되어 있고 여동생(김현주)까지 잡혀와 양서이용협동조합 문제로 조서를 받고 있었다. 때문에 나를 포함하여 녹두서점 식구 5명 가운데 누구를 기소하고 누구를 훈방해야 할지를 논의한 것이다.
다행히 큰형(김상윤)과 내가 남고 형수(정현애 시의원)는 대자보 내용을 조서에서 빼고 형수 동생(정현순 목사) 그리고 여동생(김현주)과 함께 훈방되었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이제는 큰형(김상윤)이 내란주요임무종사자가 되었다. 내란 수괴가 정동년 선배로 바뀐 것이다. 처음에는 학생수습대책위원장인 김종배를 내란수괴로 설정하였으나 운동권과 연계된 행적이 전혀 나타나지 않고 운동권인 정상용 윤상원 등은 부위원장이나 대변인으로 되어 있었다. 더욱이 YWCA의 궐기대회팀과 대자보팀 등이 모두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70년대에 민주회복운동을 주도해왔고 재야수습대책위원장이었던 홍남순 변호사를 수괴로 몰아가는 조서를 작성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홍남순 변호사의 경우 운동권과의 연계는 가능하나 결정적인 문제점은 5월 21일 무장봉기하던 당일 서울에 가고 광주 현장에 없었다는 점이었다. 결국 김대중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학원소요를 일으켜 무장봉기까지 일으키게 되었다는 논리로 정동년 선배를 고문하자 정동년 선배가 자살을 기도하였고 의식이 돌아오면서 수사관들이 불러주는 대로 조서를 작성하여 내란수괴가 된 것이다.
그러자 덩달아서 큰형(김상윤)도 혹독한 고문 끝에 김대중이 보내준 자금을 정동년 윤한봉 등을 통해 받았다는 조서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예비검속되어 현장에 있지도 않았던 정동년 선배를 내란수괴로 발표를 하자 우리는 상무대 영창 안에서 환호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문 채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우리가 이겼다’고 마음속으로 외쳤다.
5월 항쟁 당시 ‘재무장 결사항전’을 외쳤던 운동권 도청지도부를 포함하여 학생수습대책위원장과 재야수습대책위원장 모두가 내란수괴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리고 정동년 선배가 김대중으로부터 자금을 받았다고 조서에 쓰인 날은 5월 5일인데 그 날 정동년 선배는 가족과 함께 광주공원에 나들이를 갔고 거기에서 여러 교수님들을 만났기 때문에 재판이 진행되면 무죄를 증명할 수 있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갑오년 동학농민전쟁 이래 다시 일어선 전라민중무장봉기였으나 실제 사형집행은 한사람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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