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농 선생댁 카나리아
남농 선생댁 카나리아
  • 문틈/시인
  • 승인 2013.08.22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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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끔 유달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생전의 남농 선생 댁에 놀러가곤 했다. 그림을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카나리아 때문이었다. 늘 그림을 그리시는 화실 한 켠엔 작은 새조롱이 하나 있었는데 그 조롱엔 카나리아 한 마리가 푸득거리고 있었다.
카나리아는 이따금 울음소리를 내곤 했는데 그 울음소리는 클래식 가수가 부르는 노래보다 더 아름답게 들렸다. 하지만 그 울음소리는 어딘가 슬픔을 자아내는 그런 것이었다. 초록색과 청색으로 비단을 짜놓은 듯한 옷차림을 한 카나리아는 모이를 쪼아먹다가 목을 축이곤 남농 선생이 붓에 먹을 묻혀 화선지를 방 바닥에 펴놓고 소나무 숲 아래서 노인 혼자 강에 낚시를 던지고 있는 풍경이 그려지는 장면을 조롱 사이로 바라보곤 했다.
나도 카나리아와 함께 숨죽이며 하얀 화선지에 선경이 떠오르는 장면을 바라보았다. 그림이 그려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자주 조물주도 천지장조 첫날 남농 선생처럼 붓으로 그림을 그려놓고 훅, 하고 숨을 불어넣어 이처럼 우리가 사는 아름다운 세상을 떠오르게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하곤 했다.
남농 선생 댁에는 내방객들이 찾아와 있을 때가 많았다. “어이, 자네 인사드리게. 이 분은 이번에 서울서 부임해온 검사장이야, 이 분은 경찰서장이고.” 난 엉겹결에 그 분들을 향해 넙죽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곤 했다.
내방객들은 카나리아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했다. 오직 그림에 눈길을 보내거나 남농 선생이 이따금 던지는 유머에 왁자하게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남농 선생은 그림을 그리는 중에도 가끔 유머를 구사하곤 했다.
어쩌면 카나리아는 남농 선생의 그림 그리는 마음을 부축이고 카나리아 울음소리에 기분 좋아진 남농 선생은 유머로 내방객들을 즐겁게 하는 그런 흐름이었다고 할까. 카나리아가 한참 울고 나면 다음 차례로 으레 남농 선생이 유머를 던지곤 했으므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모르겠다. 그림이 잘 그려지는 흥에 넘쳐 유머로 좌중을 즐겁게 한 것인지도.
그림을 사숙하러 오는 제자들이 이따금 무등다를 내오곤 했다. 그윽한 향이 번지는 귀한 무등다를 한 잔씩 마시며 세속을 떠난 화실의 분위기에 사람들은 죄다 선한 표정을 지었다. 다시 카나리아가 목을 빼서 울음소리를 낸다. 카나리아 울음소리는 참새나 까치나 비둘기나 그런 새들과는 전혀 다른 울음소리다. 몇 소절의 명곡 같은 멜로디를 구슬프게 뽑았다. 그 울음소리가 화실의 예술적 분위를 한것 돋우었다.
하지만 나는 늘 작은 새장의 카나리아가 참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조롱에 갇혀서 날지도 못하고, 주는 모이만 쪼아먹고, 저렇게 좁은 새장에서 울음 우는 카나리아를 그래서 아무도 몰래 창밖으로 날려주고 싶은 생각이 들곤 했다.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만일 화실에 나 혼자만 있게 된다면 새조롱을 열어주어 새를 훨훨 날려주었을지도 모른다. 하루는 찾아가니 남농 선생 혼자 계셨다. 마침 잘 됐다싶어 카나리아 문제를 조심스레 꺼낼 심산으로 말씀을 드렸다. “카나리아가 외롭겠어요. 저렇게 늘 혼자 있으니 말예요.” 남농 선생이 한참 나를 빤히 보더니 말했다. “이보게. 카나리아는 짝이 있으면 울지 않는 법이야. 혼자 있어야만 짝을 그리느라 슬피 우는 거지. 그래야 나는 그 노래를 듣고.”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카나리아 해방 문제는 꺼내지도 못했다. 남농 선생은 세상의 문리를 터득하신 분이었다. 단순한 화가가 아니었다. 난 카나리아 사건 이후 모자람이 있는 곳에 아픔이 있고 아픔이 있는 곳에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농 선생의 소나무 그림을 볼 때마다 카나리아의 슬픈 울음소리가 그림 속에서 들리는 듯하다. 아, 어디 가서 다시 카나리아 울음소리를 들어볼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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