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 게바라' 광복절 의상 때문에 중징계를?
'체 게바라' 광복절 의상 때문에 중징계를?
  • 정인서 기자
  • 승인 2013.08.16 16: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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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 여론 의식 징계 수위 고려한 듯
광주의 공산주의자 정율성음악회와 인천의 조봉암 재조명사업은?

광주에서 열린 광복절 기념식 때 가진 기념공연에서 어린 소년소녀합창단이 사회주의 혁명가 체 게바라(Ernesto Guevara)의 얼굴이 새겨진 옷을 입었다고 해서 징계를 받아야 될까?

광주시는 광복절 기념식 공연에서 '체 게바라' 얼굴 의상으로 물의를 일으켰다며 합창단 이모(37·여) 지휘자를 중징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광주시는 "국가 기념행사에 사회주의 혁명가의 옷을 입고 공연한 것은 부적절했다"며 "조속한 시일 내에 징계위원회를 열어 상응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며 중징계를 예상했다. 중징계에는 해촉, 정직, 강등이 있는데 정직 이상의 징계를 받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이 지휘자는 올해 말로 임기가 만료되기 때문에 정직을 받으면 상징적으로 해촉되는거나 마찬가지로 광주시에서는 해석하고 있다.

당시 기념식장에 참석했던 전홍범 광주보훈청장이 자리에 함께 있던 강운태 광주시장에게 "광복절 기념행사의 취지와는 맞지 않는 것 같다"며 이의를 제기했고, 강 시장은 "진상을 자세히 파악해 문제가 있다면 관계자를 징계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대해 이 지휘자는 시에 제출한 경위서를 통해 "지난 6월 정기공연 때 단체로 구입한 티셔츠를 광복절 경축식 때 입고 나왔다"며 "고의가 없었다"고 해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지휘자는 2010년 1월부터 소년·소녀합창단을 맡아왔다.

이번에 시립소년소녀합창단이 입었던 체 게바라 의상은 사실 시중 거리에서 쉽게 구할 수 있고 청소년들이 즐겨입는 패션의 아이콘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즉 체 게바라는 신념을 갖고 투쟁했던 전사라는 점 때문에 그의 얼굴이 새겨진 옷들이 우리나라 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지역에서 다양하게 판매되고 있다.

이 때문에 그 의상을 입고 광복절 공연을 했다고 해서 문제 삼기에는 사실 '문제'가 있다. 더욱이 우리 독립운동가 중에도 공산주의자가 있었으나 남북이 갈라져 그들이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그동안 대한민국에서 공로를 인정받지 못하다가 최근 다시 조명되고 있는 것 점도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면 이번 제68주년 광복절을 맞아 독립운동가이자 ‘진보운동의 태두’로 추앙받는 죽산 조봉암(1899∼1959) 선생의 사상과 업적을 재조명하는 사업이 추진되고 있는 것도 한 예다. 누구보다 애국적인 삶을 살았지만 공산주의자로 몰려 정적인 이승만에 의해 ‘사법살인’된 조봉암을 되돌아보자는 움직임이 죽산의 고향인 인천에서 일고 있는 것이다.

특히 최근 광주시가 중국의 공산주의 혁명 작곡가 정율성을 추앙하는 국제음악회를 열고 있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아무리 우리 광주지역 출신이라고 하더라도, 지금 중국과의 관계가 좋아졌다고 하더라도 분명 정율성도 당시에는 공산주의자였던 것만은 사실이다.

이 점에서 체 게바라가 지금  시대에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가를 논의한다면 합창단의 의상은 큰 문제가 아닌 해프닝 정도로 끝내도 될 성싶다는 지적도 있다.

그렇다면 말썽이 된 체 게바라는 누구인가? 1928년 아르헨티나 출생으로 쿠바의 공업장관과 쿠바 국립은행 총재를 지냈고 쿠바 라카바니아요새 사령관을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1928년 6월 14일, 아르헨티나 로사리오의 바스크-아일랜드 혈통의 중산층 가정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에두아르 라파엘 에르네스토 게바라 린치와 무신론자였던 어머니 셀리아 데 라 세르나 Y 죠사는 사회주의자는 아니었으나 진보적 사고를 갖고 있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에서 의학을 배웠다. 재학 중이던 1951년에 나이 많은 친구, 알베르토 그라나도와 함께 오토바이로 남미를 돌아 방랑 여행을 경험하였다.

이 때 남미 각 나라들은 우익 쿠데타 정부가 들어서면서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경험했지만, 빈부의 격차와 노동착취가 매우 심했으며, 부유층은 최상의 삶을 누리는 반면, 서민층은 극도로 빈곤한 삶을 살아야했다. 이러한 상황을 견문하면서 아메리카 대륙에서 나타난 민중에 대한 억압과 착취의 현실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으며, 마르크스 주의에 공감을 하게 되었다.

1952년에 볼리비아 인민운동에 참가하여 외국자본의 국유화에 반대하였다. 1953년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의학대학을 졸업한 후 25일만에 친구 카를로스 페레로와 함께 다시 남미 방랑 여행을 떠난다. 볼리비아 혁명이 진행되는 볼리비아를 여행하면서, 그때까지 억압을 받아왔던 인디오가 해방되어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로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는데 큰 충격을 받았다. 그 후 페루, 에콰도르, 파나마, 코스타리카, 니카라과, 온두라스, 엘살바도르를 여행하고 하코보 아르벤스 그스만 시대 포프리스모(사회주의로 보는 견해도 있다) 정권 하에 있는 과테말라에 도착했다.

22세의 게바라, 과테말라에서 의사를 하다가 조국 페루에서 쫓겨나 과테말라에 망명하고 있던 여성운동가 일다 가데아와 만나 사회주의에 급속히 눈을 뜨고, 그녀와 결혼한다. 1950년 10월의 선거로 성립된 과테말라 아루벤스 정부는, 스페인 식민 시대부터 지속된 구조화된 수탈과 오랜 독재 부패 정권에 의해 유린된 사회의 개혁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루벤스 정권이 유나이티드 프루츠 사의 사유지에 손을 쓰면서 미국 정부는 과테말라를 맹비난 하였다. 게바라는 이 정부의 활동을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자유롭고 민주적인 나라"라고 평했다. 군부의 배신으로 CIA가 밀어준 반정부 세력 '까스띠요 아르마스'에 의해 아루벤스 정부가 전복되면서, 민주 선거로 선출된 과테말라 정통 혁명 정권은 붕괴되었다. 이 사건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게바라는 무력에 의한 라틴 아메리카 혁명을 진심으로 지향하게 됐다. 

그 후 새로 집권한 아르마스 정권에 의해 게바라의 암살령이 내려졌기 때문에, 아내 가데아 함께 실망과 분노를 안고 멕시코로 망명했다. 1955년 7월 이곳에 망명 중인 반체제 쿠바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와 만난다. 게바라는 이때, 하룻밤 사이에 반 바티스타 무장 게릴라 투쟁에 참여를 결심했다고 한다. 이렇게 스페인 내전의 공화파의 생존자였던 알베르트 바요 중령에 의한 본격적인 군사 훈련을 받고, 쿠바 상륙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1956년 11월 25일, 피델 카스트로를 반군 지도자로 하여 8인승 레저보트에 82명이 탑승해 7일후 쿠바에 도착했을 때 사전 정보 누출로 정부군의 습격을 받아 살아남은 이는 게바라, 피델 카스트로, 라울 카스트로, 카밀로 시엔푸에고스, 루이스 크레스포, 호세 모얀, 훌리오 디아즈, 카리스트 가르시아, 카를로스 베르데무스 등 12명뿐이었다.

상륙 후, 반군은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에 잠복하여, 산골 마을을 전전하면서 군 재건을 도모했다. 이후 쿠바 국내에서 활동하던 반정부 세력과 합류에 성공하여 반군 세력은 점차 강화되어 갔다. 당초 부대에서 게바라의 역할은 군의관이었지만, 혁명군의 정치 방송을 하는 라디오 방송국(라디오 레베르데)을 설립하는 등 정부군과 전투에서 그 인내심과 성실, 상황 분석, 냉정한 판단력,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점차 반군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도착 1년 후 병력 증가에 따른 부대 개편 시, 카밀로와 라울 등을 그대로 두어, 카스트로부터 제 2군(이름은 제 4군) '코만단테'(사령관, 지휘관 아래에 분대와 분대를 지휘하는 "대장"이 있다)에 임명되어 지휘권과 소령의 계급을 받아 카스트로에 이어 명실상부한 반군 이인자가 되었다.

1958년 12월 29일에 제 2군을 이끌고 쿠바 제 2의 도시 산타클라라에 돌입한다. 많은 시민의 가세로 적들을 제압하고 수도 아바나로 가는 길을 열었다. 1959년 1월 1일 오전 2시 10분 후 르헨시오 바티스타가 도미니카 공화국에 망명하자, 1월 8일 카스트로가 아바나에 입성하여, 쿠바 혁명이 달성되었다. 투쟁적인 업적과 헌신적인 작업으로 쿠바 시민권을 부여받아 쿠바 새 정부의 각료가 되기에 이르렀다.

그는 쿠바혁명 승리후 쿠바 공산당과 쿠바 혁명정부의 중요직책에 있으면서 쿠바혁명에서 얻은 것들을 지키며 혁명을 더욱 전진시키기 위하여 정력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여기서는 사형제를 부활시켜 친미또는 반혁명세력 약 14,000명을 죽였다.

쿠바혁명 승리 후 얼마간 아바나의 라 까바니아 요새수비대 사령관으로 있다가 산업발전을 조종하는 책임자로 있었으며 동시에 토지개혁의 준비에 참가하였다. 1959년 11월∼1961년 2월에 쿠바국립은행총재, 1961년 2월부터 쿠바산업부장관도 함께하였으며 1962년에 쿠바통일혁명조직 전국지도부 및 비서국에서 일하여 '쿠바의 두뇌'라 일컬어졌다. 

그는 쿠바에서 많은 일들을 했음에도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일을 찾아 떠났다. 1965년 4월, "쿠바에서는 모든 일이 끝났다"라는 편지를 남기고 행방이 묘연해졌다. 이 때 쿠바를 벗어나 볼리비아로 투쟁무대를 옮겨 바리엔토스 정권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였으나, 1967년 10월 9일 미국이 가세한 볼리비아 정부군에게 잡혀 총살당했다.

총살 후 그의 시체는 정부에 의해 언론에 공개되었으나, 체 게바라를 하찮은 인간으로 보이게 하려는 의도와 달리, 그의 모습이 예수와 비교되면서 다시 많은 이들의 추앙을 받게 되었다. 그의 시체는 30년후 볼리비아에서 발굴되어 그가 혁명가로 활동했던 쿠바에 안장되었다.

체 게바라는 사후에 전 세계적으로 '체 게바라 열풍'을 일으킬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아르헨티나 의사의 자리를 버리고 전 아메리카의 쿠데타 정부를 타도하기 위해 혁명에 뛰어들었으며, 쿠바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도 이를 박차고 또 다른 혁명을 위해 헌신하는 숭고한 모습이 사람들을 감동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체 게바라가 쿠바, 콩고, 볼리비아에서 벌인 일련의 혁명과정에서 반혁명 세력과 수많은 농민들의 피해를 가져왔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한다. 당시 쿠바에 살았던 사람들이 체 게바라를 ‘아바나 백작’이라고 부르기도 했다는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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