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닐우산에 대한 그리움
비닐우산에 대한 그리움
  • 문틈/시인
  • 승인 2013.08.07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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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비닐우산을 많이 사용했다. 대개 대나무로 살을 만들고 파란 색깔의 비닐을 뒤집어쓴 우산이었는데 그 만듦새가 조악했다. 비닐우산을 쓰고 가다가 세찬 바람이라도 맞으면 홀라당 뒤집어져 금방 못쓰게 되는 거의 일회용 우산이었다. 그래도 값싸고 갑작스런 비를 피하기는 비닐우산이 최고였다.
사람들이 쓰고 가다 버린 비닐우산이 길가에 죽은 동물처럼 널브러져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었다. 비닐우산이 뒤집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쓰고 다니던 시절이 엊그제였던 듯 한데 언제부터인가 비닐우산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조금은 고급 일회용(?) 우산이 생겼는가 하면 고급 3단 우산을 비롯 형형색색의 다양한 우산이 비오는 길거리를 수놓는다.

우산은 비닐우산을 포함해서 한마디로 정겨운 물건이다. 비닐우산은 딱 일인용이다. 둘이서 쓰기는 너무 작다. 물론 모든 우산들은 그것이 아무리 고급 우산일지라도 둘이서 쓰면 정원초과가 된다.
내가 우산이 정겹다고 한 것은 우산을 펴드는 순간 우산은 나만의 작은 공간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그 우산 속에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다. 오직 내가 주인이고 내가 거처하는 움직이는 공간이다.
어떤 때는 우산 속으로 비가 살짝 들이치기도 하지만 내 보폭에 맞추어 우산이 만든 공간은 다정하게 나와 함께 움직인다. 그렇다고 우산이 닫힌 공간을 창조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던 사람이 갑자기 우산 속으로 뛰어들며 저기 버스정류장까지만 같이 갑시다, 하고 공간에 틈입하기도 한다. 연인끼리는 각기 다른 쪽 어깨를 적시며 둘이 한 우산 속에서 마음을 나란히 하기도 하고.

비닐우산은 산업화 시대의 산물이다. 비닐이 창조경제 상품처럼 쏟아져 나오자 어지간한 것들은 다 비닐을 재료로 만들어졌다. 우비, 포장지, 병 등등. 생각해보면 비닐우산은 그 시대의 기발한 상품이었다. 하지만 나는 비닐우산을 사서 쓸 때마다 늘 불만이 일었다.
튼실하지 못한 살대, 살대와 아귀가 맞지 않은 대나무 우산대, 그리고 너무나 약해서 살짝만 부딪쳐도 찢어지거나 망가지는 그 우산이 마치 내가 사는 그 시대의 표정 같았다. 그것이 싫었다. 그리고 우리는 곧 비닐우산을 버리고 살대며, 우산대, 재질이 튼튼하고, 누르면 활짝 꽃잎처럼 퍼지는 천 우산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왜 그 빈약하기 짝이 없는 시늉만 우산인 비닐우산이 그리운지 모르겠다. 곰곰 생각해보니 그때만 해도 사람들 사이에는 비닐우산조차도 정원 초과해서 같이 쓰는, 사람끼리의 정겨움이 있었다. 지금은 아무도 낯선 사람의 우산을 같이 쓰자고도 하지 않고, 씌워주지도 않는다.

우산이 없으면 신문지를 머리 위에 들고 빗속을 달려 버스정류장까지 가거나 택시를 타거나 한다. 만일 우산을 같이 좀 쓰자고 했다간 치한이나 어깨처럼 여겨질지도 모른다. 정겨움은 간데없이 사라져 버리고 그저 우산들만 움직인다. 우산 속에는 마치도 사람이 없는 것처럼.
살기 좋아졌다고 한다. 편한 세상이 되었다고 한다. 나는 그 말에 입을 다문다. 사람의 정겨운 얼굴이 사라진 문명에 마냥 찬탄만 할 수는 없다. 비닐우산을 받치고도 우리는 비를 피했고, 정을 나누었고, 잘 살았다. 서로를 멀뚱하니 하나의 사물처럼 ‘그것’으로 보는 세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나저나 택시 운전기사는 우산을 사는 일이 없다고 한다. 일 년이면 나같은 칠칠맞은 손님들이 택시에 두고 내리는 우산이 수십 개나 된다던가. 우산은 깜박 잊고 내리는 물건 같기도 하다. 그래도 나는 바람에 홀라당 뒤집어지곤 하던 비닐우산이 정녕 그립다. 우중가인(雨中佳人) 이라는 말대로 비오는 날 뜻밖에 우연히 마음에 뛰어드는 사람들 만날 수도 있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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