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여성운동사33>칠흑 같던 80년, 민주주의의 열망 그리고 외침
<광주전남여성운동사33>칠흑 같던 80년, 민주주의의 열망 그리고 외침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3.07.25 04: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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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조적 역할에서 적극적인 역할로 성장한 광주 여성

▲지난 5월 18일 광주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에서 33주년 5.18기념식이 열렸지만 보훈처의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금지, 공식 식순 제외에 울분이 터진 유가족, 오월 어머니회 여성들은 기념식에 불참했다. 대신 70~80대 할머니가 된 그녀들은 민주의 문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공식 식순에 편성하라는 시위를 펼쳤다.
뜨거운 여름 햇빛이 내려쬐고 있다. 중부지방은 '물폭탄'을 맞은 듯 한데 남부지방은 뜨거운 열기가 이글거릴 정도다. 그렇게 빛고을 광주는 뜨거운 날씨처럼 지난 80년 광주시민 전체가 하나가 됐던 아름다운 열정을 보듬고 지금도 계속진행형을 하고 있다.

그 이면에 광주는 5.18민주화운동이 발생하고 수십년이 지난 아직까지 진상규명, 왜곡된 역사바로잡기 등으로 가슴 아픈 나날을 보내고 있는지 모른다. 33년이 지난 현재까지 5.18민주화운동은 북한군의 주도하에 발생했다고 역사를 왜곡하려는 세력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5.18민주화 운동은 유네스코 기록문화유산으로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보호받고, 후손들에게 한국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항쟁으로 인정받아야 소중한 역사인데도 유독 한국에서는 역사 폄훼·왜곡이 심각해지고 있다.
어린 여고생부터 할머니까지 참여

특히 최근 '일베'라 부르는 일간베스트 사이트의 일부 참여자들이 5.18민주화운동 역사폄훼, 종편채널의 북한군 개입설, 보훈처의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거부 등을 내세우는 것을 보면 그들에게는 한국 민주주의 기폭제 역할을 했던 광주시민들의 진실이 언짢은 듯 한가보다.

80년대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구호를 외치며 나서는 일이 더 이상 남성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특히 광주에서 발생한 5.18민주화운동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광주에서 유독 여성들의 정치참여율과 여성운동이 활발한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

평화로웠던 광주시민 모두는 시대의 아픔을 같이 겪게 되면서 80년의 광주는 ‘외로운 도시’가 됐다. 그리하여 광주의 여성들은 교복 입은 어린 여고생부터 나이 지긋한 할머니까지 각자의 방법으로 부당했던 독재정권 탄압에 맞서 민주주의를 부르짖었다.

어린 여고생과 여린 여대생들은 남학생들과 똑같이 ‘독재정권 타도’ 시위대열에 함께 했고, 이를 지켜보던 양동시장의 어머니, 할머니들은 시민군들을 위해 주먹밥과 물로 사기를 북돋아줬다.

비록 광주 이외의 도시와 통신, 교통이 단절되고 광주에 남은 이들은 계엄군에게 희생당하고 있었지만 한 여성의 가두방송으로 인해 광주의 여성들도 이를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광주 시민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편안하게 집에서 잠을 잘 수가 있습니까? 우리 동생 형제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아무 죄 없이 우리 학생들과 시민들이 죽어 가는 것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나서서 계엄군을 물리치고 광주를 지킵시다.”

▲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맞서 싸우는 시민군을 위해 양동시장에서 주먹밥과 물을 날랐던 여성들은 33년이 지난 지금까지 기념식에 참석하여 주먹밥 나눔행사를 실천하고 있다.
여성시민군 가두방송으로 퍼져나가

이후 몇몇 여성운동가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트럭에 올라 마이크를 잡고서 계엄군의 만행을 낱낱이 공개하며, 시민참여를 높이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호소력 있고 카랑카랑했던 한 목소리는 수많은 시민들을 움직이게 만들었고, 계엄군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게 만들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전옥주(全玉珠)'라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당시 나이 32세였다. 그렇게 전옥주는 목숨을 걸고 목이 터져라 심야방송을 계속했고, 도청 앞까지 행진했다. 그러다 시위대 속에서 “저 여자 간첩이다”라는 외치는 소리에 누명을 쓰게 되기도 했지만, 민주주의와 평화를 위해 개의치 않고 가두방송을 진행했다.

양동시장에서 장사하는 어머니, 할머니들은 시위에 맞서는 아들, 딸들을 위해 기꺼이 물과 주먹밥을 해 날랐다.

“워메,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제. 길거리에는 시체가 널려 있어블고 거리로 나서는 야들의 개죽음을 본 순간, 눈이 확 뒤집어지고 속이 터져브렀제. 시상에나 워째 그런일이 있었능가 몰라. 그런께 우리가 가만히 있겄능가? 그 자리에서 돈과 쌀을 모으고 학생들과 시민군에게 나눠주기 시작했제.”

5.18 당시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양동시장에서 일했던 40대의 어머니들은 어느새 세월의 시간에 따라 이제는 70세가 훌쩍 넘어버린 할머니가 됐다.

▲지난 5월 16일 망월동 (구)5.18묘지에서 열린 '오월여성제'에 참석한 광주 여성단체, 여성계 인사들은 합동참배식을 가졌다.
광주 여성시민군의 활동 연구 필요성 대두

당시 녹두서점의 여인들은 송백회 회원들로 가득 찼다. 녹두서점은 광주 민주여성 세력들의 집결장소로 쓰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여성들은 궐기문 등 유인물 제작으로 민주화운동에 가담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수많은 광주 여성들의 눈물과 노고를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수차례 진상규명을 통해 피해보상이 이루어졌지만 보상도 가시적인 활동도 남성들에게만 집중됐었다.

그리하여 지난 1988년 광주전남여성회와 한국여성단체연합은 5월을 경험했던 여성들과 ‘오월여성제’라는 행사를 추진하고, 여성단체, 여성계 인사들은 오월여성제추진위원회를 이어가며 ‘여성 행사’로 이끌어가고 있다.

현재 ‘오월여성제’는 전국의 여성단체 활동가, 시민들이 참여하면서 광주항쟁속의 여성 활동을 재조명하는 증언대회, 학술세미나, 구술집 제작, 여성계 합동 분향 등 여성의 시각에서 겪은 5.18민주화 운동에 대해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특히 올해에는 광주여성단체협의회, 광주 YWCA, 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 등이 공동 진행하여 여성 공론의 장 의미가 더욱 짙어졌다.

이처럼 앞으로 계속 5.18민주화운동에서 광주·전남 여성들의 드러나지 않은 개개인의 활동들이 가시화 되고, 여성 시민군들의 활동이 항쟁에서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꾸준히 파해쳐 볼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그간 근대 여성운동사에서 보조적인 역할만 해오던 여성들이 적극적인 역할로 성장하게 된 5.18민주화운동은 대다수 광주여성이 경험했던 가장 뜨거운 현대 여성운동사로 기록 남을 것이다./김다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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