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중에 듣는 빗소리
밤중에 듣는 빗소리
  • 문틈/시인
  • 승인 2013.07.18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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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새벽 천둥소리에 잠이 깨고 나서 다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폭우에 가까운 빗소리가 그치질 않아 그 빗소리를 내내 듣다가 새벽을 맞았다.
퀭한 눈으로 창밖을 내다보니 숲을 이룬 나무들이 거센 비바람에 온몸을 내맡긴 채 흔들리고 있었다. 바람이 부는 대로 나뭇가지들은 휘어지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하늘에서는 이따금 우르르 쾅, 쾅, 우레마차가 굴러가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오랜만에 창가에 서서 아무런 생각없이 한참 동안 비오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이 그지없이 평온해짐을 느꼈다. 흔히 사람들은 비가 오면 안 좋은 날씨라고들 하지만 나는 비오는 날이라고 해서 홀대하는 것은 마뜩찮다고 본다.
비 오고 바람 부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 아니던가. 비가 오면 맑은 날과는 또다른 할 일이 있는 법이다. 이렇게 종일 비가 오는 날 어머니는 대청마루에 비가 들치지 않도록 볏짚으로 엮은 울타리를 펴서 추녀 끝에서 마루 끄트머리까지 둘러치고는 콩이나 보리에 사카린을 약간 넣고 볶아 주었다.
방바닥에 엎드려서 튀긴 콩이나 보리를 주워 먹는 시간이 좋았다. 유년 시절의 그 장면이 지금도 이렇게 비가 오면 그리운 추억으로 떠오른다. 지금 그 생각을 하노라니 진짜로 고소한 콩 보리 볶는 냄새가 분명히 내 코끝에 스쳐온다. 아버지는 잠방이 차람에 우장을 걸치고 삽을 들고 서둘러 무논의 물코를 트려고 나가시고.
이런 비가 며칠 거퍼 내리면 학다리 들이 온통 바다가 되었다. 인근 영산강에서 거슬러온 잉어를 잡느라 농삿일을 제께놓고 병아리 가두리를 들고 잉어잡이를 하러 가서 흙탕물 바다 여기 저기를 짚어가며 잉어를 잡곤 했다.
나는 학교가 파하고 집으로 돌아갈 때 옷과 책가방을 두 손에 높이 들고 그 흙탕물로 넘치는 보이지 않는 신작로를 듬성듬성 잡풀 끝이 뾰족 솟아보이는 양 옆을 눈대중으로 살피면서 힘들게 걸어가곤 했다.
비가 온다고 해서 나쁜 날씨라고 생각해본 기억이 별로 없다. 하기사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비오는 날이 공치는 날’이 될 수도 있으니 안 좋은 날이 될 수도 있긴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비바람이 치는 날 새벽에 뒤안에 있는 늙은 감나무에서 어린 감들이 땅바닥에 툭, 툭 떨어지는 소리가 마음 아프게 들리던 기억이 잊히지 않는다. 감나무가 힘에 부쳐 놓아버린 새끼감들을 물동이에 넣어놓았다가 떫은 맛이 사라지면 건져서 먹던 것도 다 비바람이 보낸 선물같은 것이었다.
언젠가는 밤중 내내 천둥과 비바람이 그치질 않자 어머니는 종이 쪼가리를 태워 연기를 피우며 두 손 모아 천시신명께 기도를 올렸다. 그렇게도 그날 밤은 세상이 어찌 될 것처럼 무서웠다. 그날 밤에 친 천둥소리 만큼 무서운 것은 그 후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학교길에서 마을 벼논에 커다랗게 파인 벼락의 흔적을 보고 몹시 무서웠던 기억이 있다. 정말 천둥은 세상에 무슨 경고를 할 참이었던가 싶은 느낌이 들었다.
세월이 한참 흐르고 나서야 무서운 천둥 벼락이 치는 먹구름 뒤에도 찬란한 태양이 빛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비가 올 때는 언제까지나 비가 그치질 않을 것 같지만 결국 비는 그치고 태양은 빛난다. 요즘 장맛비가 그치질 않는다.
어떤 곳에서는 절개지가 무너져 사람이 다치기도 하고 길이 떠내려간 곳도 있다. 그치지 않는 빗소리를 들으며 비가 전하는 소식을 헤아려본다. 고맙다, 고맙다, 그냥 이렇게 살아 있음에 거친 빗소리를 향해 혼잣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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