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이 흘러가는 곳
구름이 흘러가는 곳
  • 문틈/시인
  • 승인 2013.07.12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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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은 지상과 하늘의 경계에 떠 있다.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다. 영국의 시인 워드워즈는 ‘나는 구름처럼 외롭게 헤매었노라’고 구름에 빗대어 삶을 노래한다. 한 시인의 외로운 일생이 긴 서사처럼 눈에 밟힌다. 마당 한 켠에 수북이 쌓여 있는 보릿대 더미에 등을 대고 누워서 무심히 하늘을 바라본다.
외로운 구름은 공활한 하늘을 정처없이 흘러간다. 대체 저 구름은 어디서 생겨나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일찍이 ‘생이란 한 조각 구름의 일어남이요, 죽음이란 한 조각 구름의 사라짐’이라 한 성현의 말을 나는 알아듣지 못하고 입때껏 죽을 둥 살 둥 살아왔다.
진정 내가 저 한 조각 흰 구름이라는 것을 일찍이 한 소식했더라면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어이 탓하고 원망하고 매달리고 했으랴. 홀연히 생겨나 홀연히 사라지는 구름의 일생이 자연의 이법이고 순리에 의한 것임을 깨닫지 못한 미욱한 내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기만하다.
독일의 시인 괴테는 언젠가 산봉우리에 올라가서 봉우리 위에 머문 구름을 보고 움막집 벽에 새겨놓았다. “모든 산봉우리마다에 휴식이 있어라.” 정말로 장엄한 시편이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을 깨달은 부처에 버금가는 경지다.
한 조각 구름이 머물고 있는 더 이상 솟을 곳이 없는 산봉우리의 경계는 진정 어떤 것일까. 휴식. 하지만 내게는 살아오는 동안 한 번도 휴식이 주어지지 않았다. 왜냐 하면 어느 산봉우리에도 올라가 본 적이 없었으니. 나는 아직도 비탈진 산기슭을 올라가고 있을 따름이다.
구름은 이리저리 걸림이 없이 헤맨다. 자유라는 말로도 다할 수 없는 경지다. 너는 거기 있고, 나는 여기 있고의 지상의 문법에 얽매여 있지 않다. 그저 만상의 자재한 영혼이랄까.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가 만물에서 상징을 읽어냈듯이 구름으로부터 나도 상징을 읽는다. 구름은 삶의 궁극을 설파한 경전의 한 대목이요, 우주질서의 철리를 보여준다. 인생에는 특별한 목적이나 가치가 없다는 것을 들판에 그림자를 남기고 가는 저 구름은 소리없이 말한다. 인생에 여사한 목적이나 가치가 없으므로 그저 열심히 살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그러므로 산다는 것은 살아낸다는 뜻에 다름 아니다. 삶이란 어쩌면 강요된 체벌일지도 모른다.
구름을 현자라고 부르고 싶다, 스승이라고 부르고 싶다. 마치도 죽고 살고가 거기에 달려 있는 것처럼, 품었던 이념이나, 존망이 걸린 것처럼 다투어온 이해나, 부질없는 세속의 욕망 따위를 멀리 지나가 이윽고 만상의 본디 모습을 구현한 구름. 성자의 모습이다. 구름이야말로 자연이 만든 종교가 아닌가 싶다.
중국의 시인 도연명은 구름을 이렇게 노래한다. “만물은 제각기 의탁하는 바가 있는데/외로운 구름은 홀로 의지할 곳 없다.” 구름은 저 혼자 허허롭고 저 혼자 쓸쓸하다.
구름은 환상이며 실재이다. 구름이 흘러가는 것을 보노라면 마치 구름 위에는 무엇인가 있을 것만 같다. 그렇다. 구름에 실려 보내는 것은 시인의 이룰 수 없는 환상이다. 왜냐하면 구름은 태어날 때부터 시인의 가족이기 때문에. 그러니 눈을 들어 구름을 바라보라. 구름이 태어나는 것을 보라. 구름이 사라지는 것을 보라. 구름이야말로 삶이 무엇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위대한 계시임을 알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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