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열사 합수 윤한봉, 우리 곁에 잠들다
민주열사 합수 윤한봉, 우리 곁에 잠들다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3.06.27 08: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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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주기 기념, 유홍준 교수와 함께 떠나는 강진답사
민청학련 사건 주도, 긴급조치 위반 등 파란만장 인생

“윤한봉, 그의 이름을 기억 못하는 사람은 나이가 너무 어리거나 세상을 너무 쉽게 산 사람들입니다”

민청학련 사건 주도, 12년간 도피생활, 5·18마지막 수배자 등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다간 사나이가 있다. 이름하여 합수 故윤한봉. 촌스럽고 털털했던 그의 별명은 합수였다. 전라도 말로 ‘똥과 오줌이 섞인 거름물’을 말한다.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시작된 일정

80년 당시 5.18민주화항쟁의 수배자로 인해 도피생활 끝에 눈감는 날까지 민주화를 위해서 살다간 그는 ‘한 없이 자신을 낮추고 민중과 더불어 살겠다’는 뜻으로 합수라 불리길 원했다.

뜨거운 태양이 내려쬐는 여름 피서철이 다가오기 전인 지난 6월 22일, 국립5.18민주묘지에 웬일인지 전국에서 찾아온 수많은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합수 윤한봉 기념사업회가 열사 6주기를 맞아 유홍준 명지대 교수와 5.18민주묘지 추모 및 참배, 윤한봉 열사 고향 강진 남도답사를 준비했다.

이날 ‘미술사 유홍준 선생과 함께 하는 2013 민주주의 역사문화답사-합수 윤한봉의 고향, 청자의 고향 강진’ 1박 2일 프로그램은 서울, 경기 광주, 전주 등에서 120여 명이 참가했고, 5.18민주묘지에서 추모를 마친 뒤 강진답사 길은 설렘이 가득차 보였다.

이들은 추모행사를 가진 뒤 윤한봉 선생의 고향인 강진 ‘벽송마을’에 있는 생가를 찾았다. 그가 살았던 벽송마을은 푸른 소나무가 둘러쌓여 푸릇푸릇하게 우거진 녹음이 꽤나 상쾌했다.

▲합수 윤한봉 열사의 생가인 강진군 칠량면 동백리 '백송마을'
▲김미이, 정수미씨 (48.서울 강남구/ 서초구)

이번 프로그램에 참여한 정수미·김미이씨(48·서울 서초구/강남구)는 “저희도 지금은 서울에 살고 있지만 광주에서 살면서 5.18민주화항쟁을 겪었던 세대다”며 “윤한봉 열사의 이런 프로그램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참여하게 됐는데 와서 생가를 둘러보니 너무나 푸근한 느낌이 들고 기분이 좋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렇듯 민주화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윤한봉 선생은 1947년 12월 22일 전남 강진군 칠량면 동백리에서 태어나 광주일고(제11회 출신)를 졸업하고, 지난 1971년 전남대 축산학과에 입학하게 됐다.

하지만 당시 시대상황은 3선 개헌과, 유신헌법을 발포하고 반독재 정권으로 가슴속 뜨거운 민주화의 울분을 끌어올리게 했다. 이후 민주화를 위해 반독재투쟁결의 유인물 배포, 민청학련 사건 주동자로 지명수배 받아 지난 1974년 1심에서 무기징역, 2심에서 15년 구형을 받게 됐다.

합수 윤한봉 선생 추억 깃든 장소 찾아

결국 전남대에서 제적을 받았지만 이듬해 형집행정지로 출소하게 됐다.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뜨거운 열망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바로 다음해 1975년 인혁당 관련 인사 사형집행 독재 타도 결의를 주도하고, 76년 부활절 예배사건에 연루가 되어 또다시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옥살이를 해야 했다.

▲합수 윤한봉 열사의 모교인 칠량초등학교
참가자들은 대열을 따라 윤한봉 열사의 모교 칠량초등학교를 방문했다. 강진에 있는 칠량초등학교는 드넓은 운동장에 시원한 나무그늘로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주고 있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출간 20돌을 맞이하는 유홍준 교수는 “윤한봉, 그가 했던 언로를 생각하면 우리들이 하는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며 “그가 무엇을 한다는 소식을 들을 때면 나 자신을 추스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아직도 우리들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강진군 대구면 용운리에 위치한 정수사 입구
▲미술사 유홍준 명지대 교수
▲정수사
다음 코스는 강진군 대구면 용운리에 있는 정수사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도 윤한봉 선생이 잠시 머물다 간 곳으로 녹음의 싱그러움과 상쾌한 맑은 공기를 느낄 수 있다.

마지막 답사 코스로는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강진청자박물관을 방문했다. 이곳에서 참가자들은 유홍준 교수의 강연이 듣기 전 미리 고려청자에 대해 눈으로 직접 살펴보고 설명을 들었다.
▲강진청자박물관
▲이명준씨(66.서울 옥수동)
박물관 관람 도중 만난 이명준(66·서울 옥수동)씨는 “윤한봉 그 사람은 내 친구였지. 수배시절에 도피하고 있을때는 자주 만났었어. 그 놈 장례식 이후에는 처음으로 강진이랑 광주에 오게 됐는데 감회가 정말 남달라”라며 “참 그놈은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다간 놈이었지. 우리 연배들을 만나면 항상 한봉이가 너무 그리워. 그 놈 한 성깔, 한 놈이었거든”라고 그리워했다.

그렇게 문화답사 일정을 끝내고 유홍준 교수는 강진아트홀에서 같은날 오후 5시부터 ‘천하제일 고려비색, 고려청자의 발생과 아름다움’을 주제로 강연을 했다.

힘든 도피 생활 끝에 역사 바로 잡기 나서

강연에서 유 교수는 “한국 예술품이 세계에 나갔을 때 청자만큼은 최고로 꼽히며, 우리 조상님들은 청자들을 소중히 여기셨다”며 “우리도 고려청자의 위대함, 섬세함에 대해 존경심을 가져야 하고 청자는 오늘날 고려시대 문화를 빛나게 해준 것이다”고 설명했다.

프로그램이 끝난 후 만난 윤한봉 열사의 아내 신경희(53·봉선동)씨는 “처음 남편을 만났을 때는 선배님으로 만났지만 그는 나보다 어렵고 못사는 처지에 있는 분들에게 눈을 뜨게 해줘서 너무나 고맙다고 생각한다”며 “남편은 나를 ‘소하’라고 부르기도 했다. 소하는 물의 본질이라는 뜻으로 물이 흐르는 대로 살라는 것도 있지만 바위를 뚫을 수 있는 것처럼 굳세게 사는 것도 있는 담겨져 있다. 이처럼 남편에게 배운 것은 너무 참다워 나에겐 스승님이기도 했다”고 글썽였다.

▲합수 윤한봉 선생의 부인인 신경희씨와 윤한봉 선생. ⓒ합수 윤한봉 기념사업회 누리집
이렇게 우리 가슴속에 영원히 기억해둘 합수 윤한봉 선생은 1980년 5.18 당시 광주에는 없었다고 한다. 이미 70년대 독재정권 민청학년, 인혁당 사건 등으로 인해 몇 차례 구속전과가 있었으며 5.18민주화항쟁이 터지자마자 핵심주동인물로 지목되어 현상 수배됐기 때문이다.

합수 윤한봉이 잡히면 고문 정도가 아니라 죽을 목숨이었기 때문에 1년여 우여곡절 도피생활 끝에 결국 지난 1981년 미국으로 망명을 했다.

그는 살아남아 있는 것이 몸서리치게 죄책감이 들었지만 부끄럽지 않은 역사, 민주주의를 이루어 내기 위해 미국으로 망명을 가서도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반미주의적 태도, 통일운동, 전두환·노태우 방미규탄 시위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한편 합수는 망명 이후 12년 만에 귀국을 하고, 역사를 바로잡는 일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1994년에 5.18기념재단 창립 주도를 했고, 이 외에도 민족미래연구소 설립, 박관현 열사 장학재단 이사, 들불열사기념사업회 결성 등 다양한 활동 중 폐기종 건강악화로 향년 61세에 별세했다.

이후 2007년 합수는 국민훈장 동백장 추서를 받고, 국립 5.18묘지에 안장됐지만 죄인으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결국 고인이 되고 나서 지난 2010년 서울 중앙지법 형사하의 22부는 민청학연 사건에 연루돼 긴급조치 위반 협의 등으로 실형이 확정된 故윤한봉 민족미래연구소장의 국가보안법 위반과 내란예비음모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처럼 1박 2일의 여정을 이끌었던 유홍준 교수의 말을 곱씹어 볼 일이다.

“합수 윤한봉, 그의 이름을 기억 하지 못하는 사람은 나이가 너무 어리거나 너무 세상을 쉽게 산 사람들입니다.”/김다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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