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석, 우리는 왜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나
나혜석, 우리는 왜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나
  • 권준환 시민기자
  • 승인 2013.06.13 15: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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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염문, 이혼 그리고 이혼고백서
80년 전 여성의 인권을 외쳤던 여인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문필가였던 신여성

▲나혜석
대한민국의 1920년대와 1930대를 떠들썩하게 했던 여성이 있다. 바로 서양화가이자 문필가였던 나혜석(羅蕙錫. 1896~1949)이다.

나혜석은 1896년 시흥군수, 용인군수 등을 지낸 아버지 나기정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상류층 집안에서 자란 그녀는 한국 여성 최초로 동경여자미술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최초의 여성서양화가, 최초의 여류화가 개인전 등 성공가도를 달리던 뛰어난 신여성이었다.

그녀는 단편소설 경희를 발표할 때 ‘여성도 남성이 하는 일을 다 할 수 있는 사람’ 이라며 여성의 인권 신장을 주제로 내세웠다.

이렇게 뛰어난 예술가를 우리가 왜 잘 모르고 있는지는 그녀의 결혼, 염문, 그리고 이혼의 스토리를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그녀는 남편 김우영(金宇英)의 오랜 구애를 받아들여 1920년 이례적으로 신식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그러다가 1927년에 자신의 예술적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남편과 함께 미국, 유럽여행길에 오른다. 나혜석은 파리에서 그림 공부를 하고, 남편은 영국에서 법학 공부를 했다. 세계여행은 그녀에게 신선한 영감을 주었고, 서구 여성의 진보된 지위 등을 둘러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파리에서 공부하는 동안 최린(崔麟)과의 염문으로 인해 남편 김우영에게 이혼을 통보받게 된다. 김우영과 최린 모두에게 버림받은 나혜석은 ‘이혼고백서’를 발표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역사가 나혜석을 ‘불륜을 저지르고 이혼당한 부정한 여인’으로 기억되게 만든 주요한 원인이었다.

그녀는 이혼고백서를 통해, 정작 자신은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여성에게만 정조를 요구하는 조선 남성들을 과감히 비판했다. 하지만 딱딱했던 그 시절 조선 사회에서 나혜석의 이러한 외침이 곱게 받아들여 질 리가 없었다.

그녀에게서 등 돌린 조선 사회는 그녀의 소품전 마저 외면하며 빈곤에 허덕이게 했다. 생활고의 고통 속에서 말년을 보내던 그녀는 결국 서울의 한 무연고자 병동에서 숨을 거둔다.

시대를 너무 앞서간 나혜석의 생각이 그 시대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 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80여년이 지난 지금, 고등교육을 받은 신여성으로, 문학과 그림 모두 뛰어났던 예술가로, 여성인권신장을 외친 여성운동가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권준환 시민기자

▲나혜석과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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