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산 창조마을 만들기, 2% 부족한 채 충효열은 사라져
박산 창조마을 만들기, 2% 부족한 채 충효열은 사라져
  • 박용구 기자
  • 승인 2013.05.15 21: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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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 사업비 집행에는 의문 들어 전체적 재점검 되어야

광주시 광산구 어룡동에 박산마을이 있다. 개촌 년대는 분명하지 않다. 조선 초기 죽산박씨가 터를 잡고 살았으며, 송천 양응정 선생이 처가 마을인 이곳에 정착 ‘박산’ 또는 ‘박뫼’라 부르게 했다.

조선 명종 때 문신이며 학자였던 송천 양응정선생은 선조5년(1571)에 간신 이양의 시기와 모함을 피해 대사성직을 그만두고 이곳에 정착했다.

송천 양응정선생의 셋째아들이 충민공 양산숙이고, 오재 양만용 선생은 송천 선생의 손자다.

‘충효열’의 양씨삼강문

이곳에 있는 양씨삼강문은 충민공 양산숙 일가 7명을 기리기 위해 인조 13년(1635)에 세운 정려문(旌閭門)이다.

정려문은 충신, 효자, 열녀 등을 표창하기 위해 나라에서 그 동네에 세워주는 문을 뜻한다. 양씨삼강문은 정면 5칸·측면 1칸짜리 맞배지붕의 평범한 건물이다.

원래는 양산숙을 비롯하여 효자, 열녀, 절부 각 2명씩을 모셨으나, 회진임씨 문중으로 출가한 양산룡의 딸은 임씨문중에서 모시고 있어 현재는 6분의 정려만을 모시고 있다.

충민공 양산숙은 임진왜란(1592) 때 진주성 전투에서 왜군과 싸우다 김천일장군과 함께 순절한 무인이다.

효자로 모셔진 양산룡과 양산수는 양산숙의 형제로, 정유재란(1597) 때 삼양포에서 왜군을 만나 어머니를 구하려다 순절한 인물들이다.

절부로 모셔진 양산숙의 어머니인 죽산박씨는 왜군을 만나 바다에 투신하여 순절하였으며, 그의 부인인 광산이씨 또한 왜적에 항거하다가 자결하였다. 김광운에게 출가한 누이 양씨는 왜군을 만나 바닷물에 몸을 던져 자결하고 말았다.

송천 선생의 손자인 오재 양만용 선생은 강항(姜沆)·박동열(朴東說)의 문인이다. 1633년(인조 11) 사마시에 장원하고, 이 해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시강원설서(侍講院說書)·예문관검열·예조좌랑을 역임하였고, 1636년 청나라가 침입하자 의병을 일으켰다. 검열로 있을 때 직언으로 인하여 권신(權臣) 김자점(金自點)의 비위에 거슬려 승진에 많은 제약을 받았다.

그러나 군수·현감 등 외직과 수찬(修撰)·집의(執義)·사간·응교(應敎) 등 청현직(淸顯職)을 두루 거치면서 정치제도 개선에 많은 공을 세웠다. 영국원종공신(寧國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저서로는 ‘오재집’ 2책이 있다.

이처럼 이 마을은 ‘충효열’의 기개가 숨쉬고 있는 곳이다.

한말 호남의병의 근거지

또한 박산마을은 한말 호남의병이 활동했던 근거지로도 유명하다.

박산마을에서 어등산으로 오르는 길은 김태원 의병부대뿐만 아니라 조경환 의병부대 등 수많은 의병부대들의 전적지였다.

이 마을에는 의병들이 마셨던 우물인 은항정과 훈련장이 있다.

그래서 박산마을은 ‘충효열의’의 마을이라고 정의해도 무방하다.

이 같은 문화적 자산을 가지고 있는 박석마을의 창조마을 만들기 사업은 어딘지 모르게 2%가 부족하다. 자산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다는 느낌이다.

‘자연과 역사를 가꾸는 행복 창조마을’이란 주제로 한 마을만들기 사업이 지난 2011년부터 2012년까지 2년간 이곳에서 추진되었다.

마을조경사업이 창조마을 만들기(?)

광주시 광산구 어룡동 ‘행복한 창조마을 만들기 박산마을 자치위원회’에서 추진한 창조마을 만들기 사업은 ‘마을조경사업’과 ‘마을 숙원사업’에 머무른 면이 강했다.

‘충효열의’의 전통을 살리는 시설이나 프로그램에는 극히 적은 사업비가 투입되었으며, 인근 관광자원과 연계하는 프로그램도 미약했다.

전체 사업비 3억9천만원 중 마을 조경에 투입된 사업비는 1억9천여만원이나 된다. 이를 비율로 따지면 48.71%다. 여기에 조형물까지 더하면 그 비율이 51.79%를 넘는다.

반면 이 마을의 자산이라고 자랑하고 있는 ‘충효열의’의 주제와 연관이 있는 사업에 투입된 비용은 7,500여만원에 불과하다. 이를 비율로 따지면 19.37%다.

사업의 우선순위가 뒤바뀌었어도 한참 뒤바뀌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마을 인물 중심의 벽화는 마을 자산과 잘 연계

타일을 이용해 송천 양응정선생, 충민공 양산숙 선생, 오재 양만용 선생의 일화를 벽화로 제작한 사업은 이 마을의 자산을 잘 살린 부분이라 할 만하다.

마을내 주택가 골목길을 ‘충효열’ 등 테마가 있는 길로 조성하여 이 마을을 찾는 사람들에게 마을역사와 인물들에 대한 이해가 쉽도록 조성한 것은 박산마을의 특징을 잘 살린 부분이었다.

이 마을의 인물을 중심으로 그들의 일대기를 설명하고 있는 벽화를 제작한 부분은 다른 지역의 창조마을 벽화와는 차별성이 있었다.

벽화와 더불어 지하수를 음용할 수 있도록 담장 아래에 조그만 약수터를 만들어 놓은 것도 보기에 좋았다.

또한 삼강전비 이전 및 주변 환경을 정비한 사업도 이 마을의 자산과 연계가 잘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시화판은 시화의 범위가 너무 확대되어 이 마을만의 특징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있다는 인상이 짙었다.

게다가 10개를 설치했다고 되어있는 이 시화판은 8개만이 확인되었다. 또 어린이집 아래의 시화판은 차에 치었는지 찌그러져 있었는데도 제대로 보수가 안되어 있었다.

의병을 설명하는 안내판 전무

이야기가 있는 자연역사 탐방로 조성도 ‘의병’과 관련이 깊은 사업으로 의미가 있었다.

다만 2Km에 불과한 이 탐방로를 조성하는데 1,800여만원이나 들었다는 것은 의구심이 일기에 충분했다. 힘든 공사구간도 없는 기존의 오솔길을 약간 넓히는 일에 이 금액을 사용했다는 것이 합리적인지는 따져볼 일이다.

이 탐방로가 아쉬운 또 다른 점은 이 길을 걸어본 결과 의병에 얽힌 이야기들을 소개하는 안내판 하나 없었다는 것이다. 시급하지 않은 사업 하나만 줄였어도 이 의병길이 이처럼 썰렁하지는 않았을 터이다.

이 사업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업은 마을조경과 마을숙원사업이었다.

마을조경의 백미는 마을 생태연못이다. 여기에 2년간 7,500만원이 투입됐다. 2011년에 5,500만원이, 2012년에 2,000만원이 들어갔다.

초기 연못조성에는 찬솔종합건설(주)가 참여했다. 발주는 광산구청에서 직접 했다. 2012년에는 2,000만원을 들여 이 연못 둘레에 보령석을 쌓았다.

한 번에 할 수 있는 단일 공사를 두 번에 나누어 진행했다.

전시관과 사랑방, 활용도 낮아

게다가 총 9,900여만원에 이르는 사업비를 들여 조성해 놓은 박산전통유물전시관과 행복나눔 사랑방은 활용도가 낮았다.

행복나눔 사랑방은 광주시에서 행한 행복한 창조마을만들기 평가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사업이다.

이 사업이 높은 평가를 받은 이유는 마을 자치위원장과 큰빛생태어린이집 원장이 각각 1천만원씩 2,000만원을 사비로 부담하여 매입한 후, 마을자치위원회 공동명의로 등기를 했기 때문이다.

사비를 털어서 마을자치위원회 공동명의로 한 부분은 높이 살만한 일이다. 대신 행복나눔 사랑방에 무려 6,400여만원이 들었다.

물품 구입에 1200여만원, 영상 및 사료수집에 1400만원이나

리모델링, 전기, 상수도, 책상, 의자, 책장, 마당정비, 돌담길 복원 등에 이 돈이 사용됐다. 특히 책상, 의자, 책장 등 물품 구입에 1,200여만원이 사용됐다는데, 내부를 아무리 둘러봐도 이 금액이 사용된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마을회관 창고를 수리해 조성한 박산전통유물전시관에는 3,500만원이 들었다. 리모델링, 생활사영상제작 및 사료수집, 빔프로젝트, 책상 구입 등에 이 돈이 사용됐다.

전시관 내에 전시되어 있는 옛물건들을 주민들이 직접 기증한 것은 좋아 보였다.

하지만 생활사영상제작 및 사료수집에 1,400만원이 들었다는 것은 의문이다. 확인한 바에 따르면 5분짜리 마을이야기 영상, 마을이야기 지도, 생활사 지도, 마을 유래 현황판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는데, 이것이 1,400만원이면 기가 찰 노릇이다.

더 큰 문제는 이 공가와 폐가를 활용한 투어체험도, 어떠한 교육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방문객들에게 과거 농민들의 삶 및 박산마을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하기로 한 조성 취지를 무색하게 하고 있다.

사랑방이나 전시관의 문을 늘 열어두냐는 기자의 질문에 마을 주민은 “사람들이 오면 문을 열고 오지 않으면 잠가둔다”고 답했다.

15개의 내 집 앞 화단은 어디로

항아리, 절구통 등 버려진 재료를 활용해 마을 주요 지점에 20개의 골목 화단을 조성했다고 한 ‘내 집 앞 화단’은 5개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15개의 화단은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방문객들의 도르레 체험 및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장소로 활용하고자 마을의 버려진 우물을 복원한 옹달샘을 찾거나 이용하는 사람들은 구경할 수 없었다. 이 옹달샘 복원에는 2,000만원이 들어갔다.

이 옹달샘을 이용하는 주민들이 있느냐는 질문에 이 마을 주민은 “지금은 집집마다 수도가 들어와서 사용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이 주민은 “이 우물이 큰샘이어서 예전 마을 사람들이 모두 이용했다. 시방도 물이 영판 좋다”고 설명했다.

황룡강변을 가족과 함께 달릴 수 있도록 구비해 놓은 자전거는 박산전통유물전시관 안에 방치되고 있었다. 이용객이 없다는 반증이다.

200만원을 들여 8대를 구비해 놓았으나 7대만이 확인되었다. 1대는 어디로 사라져 버렸다.

토속적 정취가 나는 실개천 조성으로 수생식물 식재와 미꾸라지, 다슬기 등 토종 어류를 풀어 주민과 학생들의 생태학습원으로 활용하고자 만든 실개천은 현실적으로 미꾸라지, 어류 등을 키울 곳이 못되었다.

‘아우라코리아’, 북구에서 광산구까지 진출

농촌마을의 정취가 느껴지도록 댁호를 담은 문패를 제작, 각 세대에 부착한 내 집 앞 문패달기는 ‘아우라코리아’사업이었다.

‘아우라코리아’는 문패 도안에서 제작까지 다 맡음으로써 360만원의 매출을 올렸다. 36개를 달았으니 개당 10만원씩이다. 이 문패는 임동 무지개마을 문패와 디자인이 같았다.

‘아우라코리아’는 임동 창조마을 만들기 사업의 절반 이상을 좌지우지한 회사다. 여기서 주민들의 참여란 댁호를 알려주고 문패를 달도록 동의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주민 공동 육묘장 및 건조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만든 비닐하우스는 큰빛생태어린이집의 체험학습장과 다름이 없었다.

광산구청 소유의 토지에는 비닐하우스 세 동이 나란히 지어져 있었다. 두 동은 1,700만원의 사업비가 들어가서 지어진 것이고, 한 동은 어린이집에서 지은 것이다.

그런데 가서 확인한 결과 이 세 동이 묘하게 어린이집 앞에 위치해 있어서 어린이집의 체험학습장으로 보였다.

큰빛생태어린이집, 구청 토지 무단 점유

이 어린이집은 구청 소유의 토지를 무단으로 점유하고 있었다. 어떠한 사용료도 구청에 납부한 흔적이 없었다.

게다가 1,200여만원이나 들여 조성한 공동작업장 및 체험학습장은 개점 휴업상태에 있었다. 작약이며 개똥쑥을 심어놨지만 관리 상태는 엉망이었다.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공동작업장 및 체험학습장에 마을주민들이 자주 나가느냐는 질문에 마을 주민은 “작년에는 울역으로 나갔는데 올해는 안 나갔다”고 답했다.

이 밖에 물고기가 구름을 타고 승천하여 어등산이 되었다는 전설을 모티브로 도안한 조형물은 그늘이 지지 않는 곳에 설치되어 있어 쉼터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었다.

또, 100만원을 들여 만든 안내판 11개는 시간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페인트 칠이 벗겨지고 글씨가 바래가고 있었다.

이 두 개의 사업을 하는데 무려 1,300만원이나 들었다.

양노진 마을자치위원회 위원장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앞으로 주민 소득 및 의병과 관련이 깊은 사업을 구상하고 있다”며 “주민 소득 증대 사업으로는 우리밀 재배, 작약이나 개똥쑥 등과 같은 약초재배, 산채를 이용한 효소식품 개발 등을 계획하고 있고, 의병과 관련된 사업으로는 의병마을 표지석 설치 및 지속적인 의병추모제를 개최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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