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하-1) 조선후기 천재 시인인 풍운아
김삿갓(하-1) 조선후기 천재 시인인 풍운아
  • 박재완 시민기자
  • 승인 2013.05.09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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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고 김병연의 150번째 추모제를 지내면서
의분과 정의감 넘치고 인도주의적 평민사상 펼쳐

5월 8일은 어버이날이자, 음력 3월29일로 난고(蘭皐) 김병연(金炳淵)이 1863년(철종14년)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감했다. 무등산 자락 화순군 동복면 구암리 압해정씨 사랑채에서 한 많은 생을 떠난 지 150년 되는 날이다.
그는 이 마을 동편 동뫼(東山)에 초장(初葬)되었다. 그 3년 뒤에 차남 익균이 찾아와 아버지의 묘를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 노루목으로 이장했다.
시선 김병연은 1807년(순조7년) 경기도 양주 출생, 본관은 안동으로 자는 난고, 별호는 김삿갓 또는 김립으로 불린다. 의분과 정의감이 넘치고 인도주의적인 평민사상으로 무장한 채 해학과 재치의 풍류로 한 세상을 살다간 조선 후기 천재 시인인 풍운아이다.

조선의 뿌리 깊은 반상, 적서, 남녀의 세 가지 차별에 더하여 지역 차별로 고민한 진정한 이상주의자며, 아나키스트이고 사회주의자였다. 그런 그의 방랑 생활은 출발 동기부터 불평객과 반항아의 색채를 띠고 있다.
그것은 그가 난고(蘭皐) 외에 이명(而鳴)이라는 호(號)로 불리고 머리에 삿갓을 쓴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이명(而鳴)은 중국 서적 고문진보(古文眞寶)에 있는 불평이명(不平而鳴)이라는 문구에서 따온 것이다.
그의 불평과 반항은 계급적 몰락에서 오는 개인적 입장에서 시작되었으나 세월의 흐름과 함께 폭넓은 사회 경험을 함에 따라 세계관과 사회관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즉 조선 왕조에 대해 은근히 반대의 감정을 표시한 것은 물론 봉건 질서와 제도를 부정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의 이런 행동은 빈부의 차가 심한 당시의 사회적 불합리를 저주하고 양반 귀족들의 죄악과 불의, 거만, 허식을 증오하게 되었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기세등등했던 안동 김씨 중에서도 장동(壯洞) 김(金)으로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권문세도가의 후손으로 정신적 방황과 조부에 관한 갈등이 방랑을 하면서 이 세상의 잡다한 볼 것과 못 볼 것을 보면서 인간적의 회의감이 그늘 자괴감에 빠트렸을 것이다. 더더욱 천재적 시적 감각을 지닌 그에 정신세계가 그늘 방황에 조건을 만들어 버린 듯하다.
함경도 단천에서 한 선비의 호의로 서당을 차리고 3년여를 머무는 동안 가련과 정분을 나눈다. 가련이 기생이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퇴기의 딸이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다만 그의 나이 스물셋에 그리운 부인과 가족을 등지며 살아온 그였기에 싯귀가 처량하다 못해 애처로운 감마저 든다.
그는 이곳에서 방랑길을 잠시 접어두고 모처럼의 안정된 생화로 아름다운 기녀 가련과 사랑을 나누다, 홀연히 그의 방랑벽이 또다시 시작된다.

可憐妓詩 가련기시
可憐行色可憐身(가련행색가련신) 可憐門前訪可憐(가련문전방가련)
可憐佌意傳可憐(가련차의전가련) 可憐能知可憐心(가련능지가련심)
가련한 형색의 가련한 몸이 가련의 문 앞에 가련을 찾아왔네.
가련한 이 내 뜻을 가련에게 전하면 가련이 이 가련한 마음을 알아주겠지.

離別 이별
可憐門前別可憐(가련문전별가련) 可憐行客尤可憐(가련행객우가련)
可憐莫惜可憐去(가련막석가련거) 可憐不忘歸可憐(가련불망귀가련)
가련의 문 앞에서 가련과 이별하려니 가련한 나그네의 행색이 더욱 가련하구나.
가련아, 가련케 이 몸 떠난다고 슬퍼말아라, 가련을 못 잊어 가련에게 다시 돌아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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