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야기 74 중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여산(廬山)
중국이야기 74 중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여산(廬山)
  • 강원구 한중문화교류회 회장
  • 승인 2013.04.11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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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창에서 약 100km 떨어진 강서성(江西省) 구강시(九江市)에 있는 여산(廬山)은 이백, 백락천, 소동파의 시로 유명하다. 마침 올라간 날이 비가 오고 안개가 자욱하여 여산의 진면목을 볼 수 없었다. 여산의 아름다움은 수많은 시인묵객들이나 나그네들의 감탄의 대상이 되었다.
소식(蘇軾)은 이 여산에 왔다가 그 오묘한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있다가 칠언절구의 시 한 수를 지었다.

橫看成嶺側成峯 옆으로 보니 고갯마루요, 또 곁으로 보아도 봉우리로다.
遠近高低各不同 멀고 가깝고, 높고 낮음이 저마다 같지 않구나.
不識廬山眞面目 여산의 참 모습 알기 어려우니,
只緣身在此山中 이는 나만 내 몸이 이 산중에 묻혀 있음이로다.

이처럼 여산은 풍경이 수려하여 옛날부터 지금까지 줄곧 많은 아름다운 전설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여산은 정치적으로도 유명하다. 여산의 미려(美廬)별장은 장개석과 모택동이 기간은 달리했지만 두 명이 사용한 곳으로 유명하다. 1937년 주은래가 여산에서 국공합작을 한 곳으로 유명하며, 장개석 부인 송미령의 유물이 많이 남아 전시되어 있다.
장개석과 모택동이 여산에서 오랫동안 묵었던 때문이다. 한 건물을 두고 두 기념관이 있다. 위는 장개석, 아래는 모택동 기념관이다. 인근에는 백거이의 기념관도 있는데 기념관 보다는 매점이라는 느낌이 든다.
지금은 여산박물관이 되어버렸지만. 여산에 있는 별장 중 제1호 별장인 모택동 별장 이다. 사람들은 이곳을 노림 별장 또는 노림 1호라고 부른다.

모택동은 1959년 7월 여산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가 27세 때 은사의 딸인 양개혜(楊開慧)와 결혼했는데 국민당원에 학살되었다. 두 번 째 부인이 하자진(賀子珍)으로 1909년생인 그녀는 17세 때 공산당에 입당하고, 정강산에 들어온 젊은 혁명전사였다.
대장정을 거쳐 섬서성의 연안에 근거지를 둔 고난의 시절에 모택동을 헌신적으로 떠받들었지만, 대장정에서 얻은 상처 치료를 위해 1937년 모스크바로 갔다. 그녀와 헤어진 지 22년 만에 남창에 있던 그녀를 만났지만, 이후 죽기 전까지 만나지 못했다.
여산은 공산당의 근거지 였기 때문인지, 모택동이 선인동(仙人洞)에서 나오는 사진이 걸려 있다. 선인동은 신선들이 사는 곳으로 지금도 도복을 입은 도사 두 명이 점을 치고 있었다. 

여금호(如琴湖)란 조그만 호수는 바이올린과 같은 호수라 하여 그렇게 부르는데, 바로 옆에 꽃길이란 화경(花徑)이 있다. 이곳 백락천초당에 대림사 도화란 시가 적혀 있다.
소동파의 서림사벽시에 불식여산진면목(不識廬山眞面目: 여산의 진면목을 알 수 없구나)이란 구절이 유명하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진면목(眞面目)’이란 말이 이곳에서 생겼다. 서림사는 조그만 절이지만, 바로 옆의 돌림사는 큰 절이었다.

이백의 시로 유명한 비류직하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은 여산폭포를 보고 지은 시로, ‘흘러 내려온 폭포가 삼천 척이나 된다’는 말로 여산폭포의 물줄기는 가느다란 줄기로 길게 떨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여산은 중국 시인들이 많이 묵었으며, 중국 공산당의 근거지였기 때문에 중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 그러나 찾아 갈 때마다 안개가 자욱하여 여산의 진면목을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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