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야기 73 도연명(陶淵明)의 고향
중국이야기 73 도연명(陶淵明)의 고향
  • 강원구 한중문화교류회 회장
  • 승인 2013.04.03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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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구 박사

도연명은 중국 남북조시대 동진(東晋)의 시인이다. 기교를 부리지 않고, 평담(平淡)한 시풍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로부터는 경시를 받았지만, 당대 이후는 6조(六朝) 최고의 시인으로서 그 이름이 높아졌다.
도연명(陶淵明, 365∼427)은 강서성 구강현의 시상(柴桑)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증조부는 서진(西晋)의 명장 도간(陶侃)으로 유명한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생활이 그렇게 풍족하지 못한 소지주 정도의 가정에서 자랐다. 그의 자는 연명(淵明), 이름은 잠(潛)이다. 문 앞에 버드나무 5그루를 심어 놓고 스스로 오류선생(五柳先生)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집안 어른 노릇을 한 작은 아버지 덕분에 30대에 현령 자리를 얻었다. 그 후 군벌항쟁의 세파에 밀리면서 생활을 위하여 하는 수 없이 진군참군(鎭軍參軍)․건위참군(建衛參軍)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앞서 두어 번 직장을 그만 둔 전력이 있는 그는 아내와 자식을 제대로 건사하겠다고 작심하고 들어간 직장이지만 이마저도 곧 사표를 던졌다.

상관의 순시 때에 나가지 않고, “나는 5두미(五斗米, 하루치 봉급)를 얻기 위하여 향리의 소인(小人)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라고 개탄하였다고 적었다. 이때 던진 이 말은 도연명을 들어가기 어려운 자리를 과감히 박차고 나온다는 뜻의 ‘난진이퇴(難進易退)’의 대명사로 만들었다. 이후 낙향해 국화 농사를 지으며 시를 지었던 그의 삶은 지금까지 1500여 년간 동아시아 뭇 문인·화가들의 동경의 대상이 됐다.
항상 전원생활에 대한 사모의 정을 달래지 못한 그는 41세 때에 누이의 죽음을 구실 삼아 팽택현(彭澤縣)의 현령을 사임한 후 관계에 나가지 않았다. 이때 유명한 ‘귀거래사(歸去來辭)’를 남겼다. 향리의 전원에 퇴거하여 스스로 괭이를 들고 농경생활을 영위하여 가난과 병의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62세에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한 것처럼 그 생애를 마쳤다.

盛年不重來 一日難再辰 及時當勉勵 歲月不待人 “젊은 시절은 다시 오지 않고 하루에 새벽은 두 번 오지 않는다. 때에 이르러 지금 열심히 살라.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그의 글귀는 지금의 모든 젊은이들에게 경종을 울려준다.
그의 시풍은 맹호연․왕유 ․유종원 등을 비롯하여 많은 시인들에게 영향을 끼쳐 문학사상으로 남긴 업적은 매우 크다. 시 외에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과 무릉도원을 나타내는 도화원기(桃花源記)는 유명하다.
무릉도원(武陵桃源)은 진(晉) 나라 때 무릉지방의 어부가 시내를 따라 배를 저어 가다가 길이 멀고 가까움을 잊었다가 문득 복사꽃이 핀 수풀을 만났다.  이를 매우 이상히 여겨 다시 앞으로 배를 저어 그 끝까지 가보니, 산에는 작은 굴이 있어 마치 밝은 빛이 비치는 것 같았다.

입구를 따라 들어가니 처음에는 매우 좁아 겨우 한 사람 정도 통과할 수 있더니, 다시 수십 보를 나아가니 갑자기 앞이 탁 뜨여 밝아지면서, 집들이 잘 정돈되어 있고 사람들이 즐겁게 살고 있었다는 곳이다. 서양식으로 말하면 유토피아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상세계에 대한 동경은 멈추지 않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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