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야기 71. 등자룡(鄧子龍)장군의 고향 풍성(豊城)
중국이야기 71. 등자룡(鄧子龍)장군의 고향 풍성(豊城)
  • 강원구 한중문화교류회 회장
  • 승인 2013.03.21 13: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강원구 박사

의춘(宜春)은 온천도시로 유명하다. 물이 무려 78도로 시내에 온천물이 나와 그곳에서 발을 담그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온천수는 목욕도 하며, 마실 수도 있고, 집집마다 물이 공급되어 난방도 한다. 의춘 시내에 흐르는 강은 수강(秀江)으로 야경이 아름답다.
수강 바로 옆에 ‘송강원(松江園)’이란 공원 내에 자연박물관이 잘 만들어져 있었으며, 구경을 하고 나오니 방명을 하라고 하여 글을 남겼다. 시내에서 멀지 않은 곳에 명월산(明月山)에 올라갔으나 안개로 인하여 볼 수 없었지만, 케이블카를 이용하여 30분 동안 올라가야 볼 수 있다고 한다. 주변에 사진으로 걸어 놓은 것을 보면 아름다웠다.
의춘의 현급시인 풍성시에 들어서면 커다란 시청이 커다랗게 보인다. 주변이 깨끗하고, 시내에 자룡로, 자룡화원, 자룡진료소 등 등자룡(1529~1598)이란 이름이 많이 나온다. 그는 풍성(豊城)사람으로서 자는 무교(武橋)이다.
등자룡 장군이 운남성 총병(總兵)으로 있을 때 당나라 병사들 무덤 앞에서 ‘대당천보전사총(大唐天寶戰士塚)’이란 시를 남겼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에서 육군과 해군을 보냈는데, 육군으로 이여송(李如松) 장군을 보냈다. 해군으로 광동성 출신의 진린 장군은 제독으로, 강서성 출신의 등자룡 장군은 부제독으로 참전하였다.
진린 장군이 왜병으로 부터 공격을 당하고 진린의 아들이 부상을 당한 것을 보고는 등 장군이 이순신의 판옥선으로 바꿔 타고 진격하였으나, 명나라 수군이 그의 배를 왜선으로 오인하여 포격하여 불길에 휩싸이며 왜군들의 배가 있는 곳으로 흘러들어가 이 틈을 타고 왜적이 등자룡 선중에 뛰어들어 혼전 끝에 전사하니 향년 70세였다.
일본군들이 등자룡 장군의 목을 베어가, 등자룡의 유해는 전남 고금도에 잠시 안치했다. 이순신 장군과 같은 날 전사한 등자룡 장군은 등소평의 조상이기도 하다. 선조((1567~1608 재위)는 특별히 나무로 목을 만들어 시신을 잘 모셔 중국까지 보냈다 한다. 등 장군은 중국에서 애국장수로 추앙받는 민족영웅이다.
후일 조선 정조는 등자룡을 위해 친히 등자룡 제문을 지어 고금도 관왕묘에 배양했으며 관왕묘는 오늘날 충무사의 전신이다.
운남성 대리시는 중국이 아닌 대리국이었다. 당(唐)나라 이밀(李密) 장군이 754년 2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였으나 창산에서 몰살당한 곳으로 유명하다. 대리국은 몽고군에 의해 중국에 편입되었다.
풍성시에 두시진(杜市鎭)이란 곳을 가면 등자룡 장군의 동상이 크게 만들어져 있고, 묘는 산속 멀리 있어 가볼 수 없었다. 이곳은 남해군과는 자매결연이 맺은 지역이다.
한국인들도 앞으로 한중 간 우호를 위해 많이 참배하러 와야 할 것으로 여겨 “동상을 시골보다는 시청 주변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풍성시 정부 관계자들에게 말한 적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