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여성운동사32>여성운동 기반 다진 60~70년대
<광주전남여성운동사32>여성운동 기반 다진 60~70년대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3.03.14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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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체로 발전하는 ‘여성운동단체’

▲60~80년대 격동의 시기때마다 광주 시민들은 광주공원에 모여 궐기대회 및 회의를 가졌다.
“옛날에 가시내들은 집구석에서 살림만하고 밖에서 큰 목소리를 내문 큰일 난다고만 여겼었는디~지금은 세상이 많이 바뀌었지 그땐, 어림도 없었제 ”

봄바람이 만연한 가운데 광주공원을 찾았다. 지나가는 광주시민들의 휴식의 쉼터인 ‘광주공원’. 공원에서 쉬고 있던 김 할머니는 50~60년대 당시를 생각하며 넋두리를 둔다. 지금은 날이 어숙해지면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해 술 한 잔을 기울이는 포장마차 단지로 바뀌었지만 이곳은 광주에 격동의 시기 때마다 시민단체들이 모여 궐기대회를 갖고, 사기를 충전시키는 곳이기도 했다.

광주지역 여성운동이 가장 왕성했던 1960년대. 그 당시엔 광주 YWCA, 한국부인회, 대한어머니회, 간호협회 등이 모여 광주공원 광장에서 총궐기대회를 열기도 했었다.

해방이후 남녀평등의식 고취

지독했던 일제강점기 시절이 지나면서 신교육을 받았던 여성들은 각자 저마다 밖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일제 통치가 끝나고 해방 이후, 광복의 기쁨을 맞이하며 여성들이 집단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50~60년대로 들어서면서 여성들은 조직적으로 모이면서 남녀평등의식을 고취시켰다. 여성들도 노동운동, 농민운동, 조국광복회운동, 문맹퇴치운동 등 점점 역할을 키워가면서 사회활동을 활발하게 이끌어갔다.

해방 이후 미군정기에 행정관청에 부녀국이 최초로 설치되면서 드디어 여성들도 참정권을 획득하게 됐다. 그렇게 여성들도 여성권익을 향상시키기 위해 지난 1948년 대한부인회라는 단체를 조직했다. 이후 1952년 전남지방에서 광주가 최초로 대한부인회 광주시지부가 만들어지면서 여성들이 집단적으로 하나둘씩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가장 먼저 한 것은 긴 검정치마와 흰 저고리를 입던 옷차림부터 벗어던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백의민족’이라는 명분으로 여성들은 흰 옷과 긴 치마로 입고서 조신하게 활동해야 했다. 이에 불편함을 덜기 위해 옷고름 대신 단추달기 등 생활 간편화를 유도하여 여자들도 활동하기 편한 색이 있는 ‘유색 옷’을 입도록 개선사업을 실시했다.

긴 치마는 밑단을 잘라내어 통치마로 개조해서 입도록 권장하기도 했다. 이렇듯 대한부인회 광주지부 활동은 6.25로 공백기 2년을 거치고 1954년 대한부인회 전남지부로 재출발하게 됐다.

▲유남옥(왼쪽), 양명순(가운데), 조아라(오른쪽)
당시 회장에는 유남옥(본보 609호), 부회장에는 양명순(본보 592호), 구지순, 총무에 조아라(본보 577호~580호)가 각각 선출되어 본격적으로 조직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녀들은 호탕하고 여장부 같은 면모를 보여 왔던 이들이다.

그러다 5.16 군사쿠데타가 발발한 후 다시 여성운동은 위기를 맞이하게 됐다. 대한부인회는 잠시 활동을 접게 되고야 만다. 이후 1963년 현재의 ‘한국부인회’로 이름을 바꿔 다시 활동을 시작하게 됐다.

▲1960년대 여성들은 권익신장을 위해 YWCA 주최로 열린 축첩제도·여권을 무시한 정치가에 반대하는 가두시위를 했다.

부인회부터 전남여성단체협의회까지

“오직 국가와 사회를 위한 일이니 여자라고 해서 절대 몸을 사릴 필요가 없지~”

여성도 교육을 받기 시작하면서 사회에 진출하려는 열망이 분출됐다. 1963년 당시 182명의 대의원이 참석하고 광주극장에서 대의원 총회를 열어 임원을 선출했다. 초대 회장으로 유남옥(柳南玉)이 한국부인회 전남지부장을 맡고 이후 1981년 3월까지 전남지부의 터줏대감 역할을 해나갔다.

더욱 조직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던 여성들은 교육 및 계몽사업, 소비자 권익 신장 보호사업, 청소년 선도 사업, 경로사업, 환경정화 사업, 소년소녀가장 지원 사업 등 어려운 이웃을 보살피며 여성운동의 면모를 보여줬다.

하지만 부인회의 명칭대로 대한부인회에서 한국부인회로 명칭이 바뀌는 등 여러 차례 개편을 거듭하면서 조직의 빈틈이 보이기 시작하기도 했다. 단체 활동의 산실이어야 할 부인 회관을 놓고 재산권 다툼이 벌여져 한 때 ‘부인회관’없이 떠돌이 신세가 되기도 했다.

▲1972년 이순정(박인천 금호그룹 회장부인)은 광주공용터미널 3층을 무료로 부인회관으로 사용하도록 제공해줬다.
그러던 도중 1972년 부회장이던 이순정(李順貞·박인천 금호그룹 회장부인)의 배려로 광주공용터미널(광주시 대인동 소재)3층을 10년 동안 무료로 사용할 수 있게 제공해줬다. 현재 이곳은 광주은행 본점 빌딩이 일대다. 터미널 흔적은 사라졌지만 5.18민중항쟁 사적 3호로 지정되어 비석만 쓸쓸히 세워져 있다.

한편 부인 회관을 무료 임대해준 이순정은 1962년부터 84년까지 한국부인회 광주∙전남지부 이사장을 맡아 불우시설 돌보기, 모자가정 및 소년소녀 가장 결연 등에 앞장선 인물이기도 하다.

이렇게 한국 부인회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가운데 1967년 3월 30일 전남여성단체협의회가 결성되면서 양명순이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고 대한주부클럽연합회, 대한적십자사 부녀봉사회, 구국여성봉사단, 여성저축생활회, 대한어머니회, 백합회, 새마을부녀회 등 각 단체 나름대로 자리를 굳히기 시작했다.

산업화 노동운동, ‘민주화운동’으로 이어

개별 단체 활동보다 한 단체로 뭉쳐 여성의 단결력을 보여줌과 동시에 목소리를 키우기 위해서 지난 1966년 5월에는 광주공원 광장에서 광주 YWCA, 한국부인회, 대한어머니회, 간호협회, 조산협회 등 대표 30여명이 모여 여성생활정화운동 총궐기대회 등 조직적인 모습으로 활동을 했다.

1960년대 경제성장을 체험한 10년 뒤 1970년대는 군사정권 아래 암울한 시기를 보내야 했다. 여성운동역시 계층 간 불균형 심화로 노동문제, 사회문제가 정치문제로 직결되고 노동운동으로 확장되어 갔다.

1970년대 산업화가 정착되면서 고용비가 저렴했던 여성노동자들이 생산의 주체였고, 그녀들은 노동운동으로 경제투쟁을 펼치며 민주화 인권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광주·전남 여성들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사이에서 연대감을 축적하면서 운동공동체로 집대성했다.

이를 계기로 광주·전남 여성들은 인간으로서 권리를 찾는 사회운동뿐만 아니라 1980년대 민주화와 인권을 되찾기 위해 광주민주화운동까지 이끌어갔다./김다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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