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의소리>창간 12주년, 창간 멤버에 묻는다
<시민의소리>창간 12주년, 창간 멤버에 묻는다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3.02.21 11: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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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형배 광산구청장, 이상걸 광주광역시일자리종합센터장 인터뷰

지난 2001년 2월 21일, '지역언론 위기의 근원은 저널리즘의 위기로 그 결과 독자의 외면을 초래했다'는 시대의 새로운 저널리즘의 요구에 <시민의소리>가 창간 1호를 발행했다. 그리고 지난 12년 후 '시민과 함께 만드는 바른소리 바른언론 시민의소리'가 지역이슈를 만들어가며 대안언론으로서 그 역할을 다해오고 있다. 지금의 <시민의소리>가 있도록 초창기를 이끌었던 창간 멤버들의 이야기를 담아 창간정신을 다시 더듬어본다.

민형배 광산구청장

   
 

▲<시민의소리>에서 어떠한  활동사항을 해오셨는지.

현재 경기도의회의 양근서 의원, 국가인권위원회의 박광우 사무관 등과 함께 2001년 말 <시민의소리> 창간을 주도했다. 그리고 이후 2002년 말까지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편집국에 사람을 들이고, 신문 지면을 구성하고, 편집의 기본 뱡향을 정하는 일 등을 맡아서 했다.

▲<시민의소리>를 이끌어가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엇인지요. 그리고 가장기억에 남았던 사건들은 무엇이 있는지.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경영 측면에서는 재정문제가, 편집 측면에서는 독자들의 신뢰를 확보하는 문제가 가장 힘들다. 창간을 함께 했던 사람들은 독자들의 신뢰를 확보하기 위해 <시민의소리>라는 제호의 의미를 곱씹으며, 시민의 목소리를 제대로 대변하는 신문을 만들자고 다짐했었다.
기억에 남는 두 가지 사건만 소개하겠다. 2002년 제16대 대선 광주지역 민주당 경선이 있었던 당시다. 그 때 예비후보로 출마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우세를 예상하는 지역신문들은 한 곳도 없었다. 우리는 자체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광주지역 경선에서 1~2등 할 것을 예측 보도했다. 이후 광주경선에서 1등한 노 전 대통령이 대선에서 승리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2002년 6월 동료였던 양근서 당시 기자가 박광태 전 광주시장의 국회의원·광주시장 민주당 후보로 되는 공천 과정에 대해 의혹을 제기한 특종을 실었다. 그 기사 때문에 양 기자는 선거법 위반 등으로 피소됐다. 결국 대법원까지 가서 무죄로 확정됐지만 광주지역에서 그 기사의 반향은 상당했다.객관적인 사실에 기반해 다른 신문들이 말하지 못하는 것을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언론의 본모습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로 꼽고 싶다.

▲<시민의소리>가 기존의 지역언론과 차별화 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우리는 첫 시작부터 종합언론을 지양하지 않았다. 창간 당시 신문의 편집방향이 ‘이슈’와 ‘사람’ 중심이었다. 기존 신문에서 다루지 못하는 것을 쓰고, 민감하고 파장이 큰 기사를 심층적으로 다뤄 차별성을 부각시키고자 노력했다. 또 언론운동의 관점에서 ‘언론의 언론’ 역할도 충실히 수행하려고 했다. 지역사회의 모든 부분을 성역 없이 다룬 것이 당시 <시민의소리>의 장점이자 특별함이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이슈 신문 <시민의소리>에게 앞으로 바라는 점은 무엇인지.

창간 정신을 항상 견지해야 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슈’와 ‘사람’ 중심의 방향을 되새기면서 누구도 할 수 없는 이야기를 당당하게 말하는 신문이 <시민의소리>의 창간정신이자 올바른 미래라 생각한다. 지역 유일의 주간지로서 광주시민들로부터 듬뿍 사랑받는 정론직필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가길 바란다. <시민의소리> 창간 12년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세상살이가 더 나아지는 진보의 모습을 우리 지역사회에서 먼저 보여줄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자.


 

이상걸 광주광역시 일자리종합센터장
   
 

▲<시민의소리>에서 어떠한 활동사항을 해오셨는지.

지역 언론을 새롭게 디자인하고 시민저널리즘을 실천하고자 인터넷 중심 대안언론 ‘시민의소리’를 창간하기로 하고, ‘시민의소리’의 모태로 시민사회와 언론계가 참여하는 (사)광주시민의소리 창립발기인을 모집하고 설립하는 업무를 진행했다.
당시 지역 언론의 문제가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가운데 시민의소리에 대한 기대감이 높았고 많은 분들이 새로운 언론의 취지에 화답하여 사단법인의 회원(시민의소리 후원자)로 참여했다.
2001년 2월 21, 드디어 시민의소리가 창간되었고, 회원모집, 종이신문 인쇄, 배포망 확보 등을 위해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2002년 10월부터는 대표이사를 맡아 신문사의 자립적 경영이라는 최대의 과제를 위해 판매와 광고영업, 영호남 마라톤대회 등 다양한 수익사업도 전개하며 동분서주했다.

▲<시민의소리>를 이끌어가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엇인지요. 그리고 가장기억에 남았던 사건들은 무엇이 있는지.

좋았던 기억보다는 힘들었던 기억이 많았다. 시민의소리는 편집과 소유 및 경영이 분리되어 있다. 저는 경영파트에서 일했기 때문에 편집에는 관여할 생각도 없었고 관여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웃지 못 할 일도 많았는데, 겨우 겨우 백화점광고를 받아왔는데 그 백화점을 비판하는 기사가 같이 실려 있는 경우도 있었다.
정말 인간적으로 고민이 많이 됐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눈 딱 감고 그대로 인쇄하고 배포했다. 어렵게 광고를 준 회사담당자에게는 볼 낯이 없었던 셈이었다. 나중에는 그런 경우 해당기자에게 부탁하여 시기를 엇갈리게 조정하는 여유도 생겼지만, 창간초기에는 어림없었다.

▲<시민의소리>가 기존의 지역언론과 차별화 된 것은 무엇인지.

우선 시민의소리는 지면형식에서 새로웠다. 초기 1년은 주3회 8면씩 발행했고, 제호나 서체, 사진크기, 지면배치 등 모든 면에서 시원시원하고 신선했다. 그리고 이슈추적취재인 ‘커버스토리’, 훈훈한 이웃스토리인 ‘세상속이야기’, 문화전문인들에게 지면을 임대해 준 ‘문화난장’, 스스로 언론비평을 시도한 ‘미디어를 쏴라’ 등 지면내용도 파격적이었다.
머리기사의 타이틀도 예컨대, 동광주병원 장기파업사태에 당사자인 병원장의 사태해결책임을 보도하는 기사의 타이틀이 “OOO 나와라!”하는 식이었다. 그래서 관심을 끌 수 있었고, 특히 지면과 병행하여 인터넷뉴스가 서비스되면서 한 때는 페이지뷰가 3~4만 건을 유지하기도 하였고, 무엇보다 지역 내 기자들이 즐겨보는 매체였다.

시민과 함께하는 이슈 신문 <시민의소리>에게 앞으로 바라는 점은 무엇인지.

개혁은 정치권에게만 요구하는 게 아니라 모든 집단,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라고 본다. 언론도 변화하지 않으면 죽는다. 삼라만상이 생로병사를 하듯이 똑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연의 흐름처럼 시대에 뒤떨어지고 존재의의가 없으면 죽어야 순리라고 볼 수 있다. 오늘 시민의소리에도 그런 근본적인 물음이 필요하다.
시민과 함께 하는 이슈 신문이라고 했는데 과연 시민과 함께 하고 있는지, 지역사회의 공론장 역할을 하고 있는지 못한다면 과감히 변화하거나 자연의 순환에 맡겨야한다. 생명자체를 억지로 연장하는 것은 순리가 아니다. 이제 지역사회에서 이슈 신문의 역할은 끝나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미 이와 관련해서는 여러 새로운 차원의 시도와 새로운 매체가 생겼다. 지금은 문화나 사회적경제 등으로 특화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지면형식도 바꾸고 내용도 완전히 바꿔야 한다. 한번 독자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해서 변화를 모색하는 것도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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