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여성운동사30>대중가요로 항일정신 심어준 이난영(1)
<광주전남여성운동사30>대중가요로 항일정신 심어준 이난영(1)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3.02.21 09: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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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잃은 한을 노래 부른 ‘목포의 눈물’

▲목포의 눈물을 불렀던 故 이난영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 파도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에 새악시 아롱진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1935년 발표되어 많은 대중들에게 사랑받아온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그 당시는 일제의 폭압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였다. 나라 잃은 민족의 슬픔을 달래주기 위해서는 그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입이 있어도 말을 하지 못하고, 우리말을 못하도록 창씨개명을 강제로 하게 했던 당시. ‘목포의 눈물’은 일제강점기  말 못하게 애끓은 슬픔과 민중들의 설움을 풀어주는 한풀이 매개체였다.

여성문화 유산 최초 노래비 세워

그만큼 많은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아왔기 때문에 목포 유달산 중턱에는 최초로 노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전라권 여성문화유산인 이난영 노래비를 찾아 떠났다. 호남 근대 최초 여성교육의 산실이었던 목포에 도착해 유달산을 오르며, 뒤로는 노적봉이 보이고 명량대첩에서 일본을 꼼짝 못하게 했던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지나쳤다.

항일운동이 펼쳐진 곳이기도 한 목포는 그 만큼 일본이 노렸던 중요한 수탈구역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유달산 중턱에 오르고 바위 위에 이난영의 노래비가 있었다. 노래비는 아슬아슬해 보였지만 굳건하게 자리잡았다. 어디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잠시 멈추게 만드는 ‘목포의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만큼 이 노래는 민중들의 밑바닥에 있는 슬픔과 설움을 싹싹 긁어내 후려하게 위로해줬다. 故김대중 대통령도 이렇게 가슴 찡한 ‘목포의 눈물’을 참 좋아했고 한다.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는 이 노래는 여성인권이나 장애인 등 인권운동과 관계된 행사에서 자주 불려오고 있다.

목포는 아름다운 항구다. 전남 목포 출신인 이난영은 1916년 6월 6일 목포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양동 42번지, 속칭 양동 6거리의 산동네 초가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남순(李南順), 어머니는 박소아(朴小兒)이고, 2살 연상으로 오빠 이봉룡(李鳳龍)이 있었다.

▲철거전 이난영 생가 사진. 굉장히 비좁은 골목과 좁은 터로 지금은 생가를 복원하여 이난영 기념 소공원이 들어서있다.
▲목포에서 가장 오래된 북교초등학교의 당시 모습. 이난영이 다니던 공립여자보통학교.

여성 항일운동 근원지 목포 양동서 자라

어린 시절부터 노래에 남다른 소질을 지녔던 난영이 살던 이곳은 당시만 해도 냇가 언덕위의 바윗등으로 빈민촌이었다. 하지만 양동은 선교를 위해 들어온 교회 선교자들이 터를 잡아 활동하던 곳으로 전남 최초 교회인 양동교회, 최초 여학교 정명여학교가 있던 역사적인 곳이였다.

이 때문에 이난영은 1923년, 호남지역에서 여성교육이 가장 먼저 시작하게 된 목포에서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성으로서 삶은 그리 순탄하지 못했다. 그녀가 다닌 곳은 목포공립보통학교로 학적부에는 ‘이옥순’으로 게재돼 있다. 이난영의 본명은 ‘이옥례(李玉禮)’로 알려져 왔지만 호적 기록상은 ‘이옥순(李玉順)이었다고 한다.

이난영은 초등학교 시절 1학년과 3학년 때 각각 재수를 했다고 한다. 당시 가정 형편이 어려웠지만 학교를 계속 다니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그렇게 학교를 다니지 못할 형편이 되자 결국 1929년 4학년 때 자퇴 원서를 제출하고 학교를 그만 다니게 됐다.

그 후 조선면화주식회사 조면공장의 여공으로 일을 했지만 여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 무턱대고 극단을 찾아가 “저 가수가 되고 싶어서 왔는데요”하고 그렇게 1932년 9월 태양극단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배우들의 잔심부름과 빨래를 해주며 지내다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이옥례라는 본명대신 이난영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극단의 악사 가운데는 양동에서 어린 시절같이 자란 강영문이라는 연주가가 있었고, 각별히 친하게 지내왔다. 그는 이난영의 특출난 노래솜씨를 알고 있기에 그는 OK레코드 이철 사장을 만나게 주선하고 테스트를 받은 뒤 전속 가수로 발탁되는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다.

한편 1930년대 중반 일본제국주의는 한국을 동화시키고자 문화말살정책을 더욱 강화했다. 이에 1934년 조선일보사는 일제의 갖은 탄압 속에 위협받던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정서를 북돋우기 위한 문화 사업으로 OK레코드와 손을 잡고, 향토노래가사를 공모했다.

그러한 과정에서 무명시인 문일석(文一石)의 작품 ‘목포의 노래’가 1등으로 당선됐다. 애절한 한을 담은 ‘목포의 노래’는 OK레코드 사장이 1935년 작곡가 손목인에게 의뢰해 ‘목포의 눈물’로 재탄생하게 했다.

▲목포 유달산 중턱에는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을 기념해 우리나라 최초 노래기념비가 있다. 이곳에는 바위에서 '목포의 눈물' 노래가 흘러나와 지나가는 관광객들의 발길을 붙잡았다.

일제하 우리민족의 ‘망향가’ 불러

그렇게 어린 이난영의 목소리로 불려진 ‘목포의 눈물’은 더할 나위 없이 민족의 심금을 울리고 한을 노래하고 있었다. 이 노래는 일제하 우리 민족의 ‘망향가’였고 해방 이후에는 전라도 사람들의 ‘시름가’였다.

이 노래를 음반으로 만들어 일제의 검열을 받으러 갔을 때 “원한? 이 가사가 뭐야 뭔가 숨은 꿍꿍이가 있어”라며 일본을 겨냥한 것이라고 소란을 피웠다. 2절 가사 내용이 일경의 비유를 거슬리게 한 것이다.

“삼백년 원한품은 노적봉 밑에 님자취 완연하다…….”로 시작되는 2절의 가사가 문제되어 한때 일제에 의하여 저항가요로 분류되어 금지곡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삼백년 원한 품은’이란 구절은 3백여 년 전 명량대첩 때 이순신 장군이 일본을 꼼짝 못하게 했던 것을 지칭하는 것이었으며, ‘원한’은 일본 통치에 대한 적대감정을 유발시키는 숨은 의도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후 어쩔 수 없이 ‘원앙’으로 고쳐 음반을 발표했지만 일본의 통치를 받아야 했던 우리민중들은 ‘원한’으로 고쳐 부르며 일제에 대한 한과 저항정신을 표현해갔다. 항일운동은 총·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남자만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여가수의 한 노래를 통해서 자신의 처한 입장에서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의 한을 토로해 널리 알리는 것은 파급력이 훨씬 뛰어난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희망이 아예 보이지 않던 시절에 여성의 신분으로 많은 대중들에게 저항의식을 심어주었던 가수 이난영의 일대기를 재조명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김다이 기자

▲목포 유달산 이난영 기념비에서 내려다 본 목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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