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우연히 대선배들과 자리를 같이 했다. 술자리에서다. 서로 통성명을 하고 자리를 잡고 앉자 몇 회 졸업이냐, 고향이 어디냐, 누구누구를 아느냐, 이런 자리에서 흔히 그렇듯이 초면에 우선 신상털기에 들어간다.
대선배 중의 어느 한 분이 슬그머니 스마트폰을 꺼내들더니 내 이름자를 물어보고는 술상 밑으로 스마트폰에 입력하는 눈치다. 나는 인터넷을 이용해서 위치 정보나 교통편, 도서 목록을 검색해본 적은 있지만 어떤 사람의 신상을 찾아본 적은 거의 없다. 뭐,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딱히 누구를 검색해볼 일이 없어서다.
“14회라고?” 대선배가 내게 묻는다.
“그것이 글쎄, 사정이 생겨서 졸업은 15회로 했구먼요.”
나는 누구를 만나면 그 사람의 고향, 나이, 학교를 물어보지 않는다. 그런 것들에 관해서는 도통 관심이 없다. 그래서 날더러 누구를 아느냐, 그 사람 어느 학교 나왔지, 하고 옛 직장 동료의 신상이라도 물어볼라치면 나는 갑자기 벙어리가 된다.
나는 어떤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고 사는지, 이 세계와 삶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것이 나의 주요 관심사다. 그래서 나중에 다시 만나면 그 사람의 일이나 생각과 관련한 화제를 두고 대화를 나눈다.
대체 몇십 년 전에 어느 학교를 나왔다는 것이 무에 그리 중요하며, 고향이 어디라는 것이 어쨌다는 것인가.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라고 하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무슨 일을 하고 지내왔는지 그것이 더 중요하다고 나는 믿는다.
사실 우리가 만들고 세우고 이루어가는 이 사회라고 하는 것은 고향이나 학교를 넘어선 굳이 말하면 수십 개의 대학원 과정이요, 박사후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를 살아온 평점이 그 사람의 학교나 고향에 우선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 친구는 대단한 사람이야. 홀어머니 모시고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자수성가했어. 번 돈을 털어 무료 양로원을 세워 사회사업을 하고 있다고.”
나는 이런 사람을 ‘영웅’으로 친다. 이 세상에 와서 무엇인가 단 한 사람에게라도 따뜻한 손을 내밀어 끌어안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 부축한 일이 있다면 그 사람은 나의 존경을 받아 마땅하다.
자선단체를 설립한 어느 분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란 남을 도와보지 않고서는 진정으로 인생에서 성공했다고 할 수 없다.” 돕는다는 것이 비단 물질적인 것만을 뜻한 것은 아닐 것이다. 무슨 일을 하건 사실 사회 구성원인 우리들 각자는 나름대로 남을 돕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청문회에서 목격하듯이 부동산 투기, 위장전입, 의문스런 병역면제, 공금유용 등의 의혹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아왔다면 설령 그 사람이 대단한 경력과 대단한 자리에서 일했다고 한들 인터넷에 들어가서 특별히 검색해볼만한 가치가 있을까.
내가 술자리 같은 데를 잘 안 끼는 것은 그런 자리는 흔히 누구의 신상털기로 시종하거나 과거의 시지부지한 무용담 같은 하릴없는 수다로 끝나기 때문이다. 연배가 어찌 되었건 미래를 이야기하지 않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나는 싫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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