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여성운동사29> 4·8 독립만세운동 주역 목포 정명여학교
<광주전남여성운동사29> 4·8 독립만세운동 주역 목포 정명여학교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3.02.07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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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휘날리며, 만세운동 이끈 정명여학도

▲1903년 설립된 호남지역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 정명여학교의 1920년대 전경 모습.
수동적이었던 여성이 역동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된 시기는 언제부터일까? 가까운 근대사를 찾아봐도 알 수가 있다. 대표적으로 초창기 여성교육을 받았던 여학생들은 독립을 위해 만세운동의 이끌었던 주역으로 활동했던 내용들이 최근 재조명 받고 있다.

이들은 여성의 몸으로 총, 칼을 두려워하지 않고 추악한 일제의 만행에 대항해 조국독립을 위해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들의 독립운동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태극기이다. 광주에서도 1919년 3월 10일 수피아학교, 숭일학교 학생들이 모여 광주천 일대에서 태극기를 들고 나서 만세운동을 시작했다.

▲정명여자중학교 입구에는 학생들의 4.8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비를 건립했다.
독립선언서 담긴 봉투 전달받아

1903년 설립된 호남지역의 최초 여성교육기관인 목포 정명여학교의 여학생들도 의로운 만세운동을 펼쳐나갔다. 추적추적 겨울비가 내리는 날, 목포의 만세운동 발원지를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학교 정문을 얼마 지나지 않아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물인 ‘독립기념비’가 눈에 띄었다.

목포의 만세운동은 광주에서 있었던 만세운동보다 다소 늦긴 했지만 여학생들을 주축으로 발생했다. 만세운동의 주요 발원지는 1919년 4월 8일 목포 양동교회와 정명여학교 일대였다.

거사를 준비하기 위해 정명여학교의 교장이었던 김아각(Daniel.j. Cumming) 목사는 광주에서 독립선언서, 2·8독립선언서 사본, 결의문 등이 담긴 봉투를 은밀히 전달받았다. 이후 정명여학교 학생들과 목포 양동교회 교인들을 주축으로 비밀스럽게 조직적인 만세운동이 준비되었다.

이 봉투의 내용물들은 그로부터 62년 뒤, 1983년 중학교 교실 천정보수 작업 중에 발견돼 현재 정명여자중학교 옆 선교사 사택 2층에 사본만 남아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명여중 행정실 직원은 “원본은 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천안 독립기념관에서 보관중이다”고 설명했다. 

▲정명여자중학교 안쪽에는 1920년대 당시 선교사사택으로 사용하던 건물이 그대로 남아 현재는 독립기념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정명여중 내 독립기념관에서 소장중인 독립운동 복사본.
독립운동 준비, 태극기·선언서 제작

먼저 만세운동에 가장 필요한 태극기가 시급했다. 여학생들은 교내 기숙사와 지하실에서 은밀하게 태극기를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태극기는 당시 한문교사였던 곽우영(郭宇盈) 선생이 그려준 원형을 본떠서 목판에 태극과 4괘를 칼로 새겨 한지를 대고, 솜방망이로 목관을 두들겨 박아낸 다음 물감을 칠해서 진행했다.

정명여학교 학생들은 힘들게 만들어 낸 태극기를 둘둘 말아 보자기에 싸서 어린 아이인척 업고 다니며 목포 양동교회와 교인의 집에 하나둘씩 옮겨놓기 시작했다. 밤이면 물동이에 태극기를 담아 머리에 이고 은밀히 운반해나갔다.

▲4.8만세운동의 발원지였던 양동교회.
드디어 거사일 1919년 4월 8일 날이 밝았다. 오전 2교시 수업이 끝나고 15분간 운동시간이었던 당시. 영흥학교 김옥남 학생이 울린 비상 종소리를 신호로 여학생들과 양동교회 교인들은 삽시간에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민국 독립 만세”를 외치며 선언서를 뿌리며 시가 행진에 돌입했다.

약하고 여리기만 했던 여학생들은 얼마나 무서웠을까라는 의심이 들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 당당히 일제에 대응했다. 정명여학교에서는 최자혜, 이금전, 김보현, 이은득, 강지성, 김영순, 김복점 등이 만세운동을 진두진휘 했다.

이렇게 쏟아져 나온 인파들은 학교 정문을 지나 프렌치병원(현재 양동교회)을 지나 유달산 인근까지 진행하면서 시민들을 끌어 모아 점점 커져갔다. 독립의 염원을 가슴속에 숨긴 채 답답해하던 목포시민들도 어린 학생들의 장한 거사에 합세한 것이다.

순식간에 목포시내는 함성과 소요로 술렁거렸고 일본 경찰은 재빠르게 학생들과 시민들을 붙잡기 시작했다. 일경들은 쏟아져 나오는 여학생들을 진압하기 위해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내동댕이쳤다.

이 광경을 지켜봤던 정명여학교 김마르다(Martha Kim) 선생은 일경에 항의하며 “차라리 내 가슴에 총을 쏴라”고 대응하다 체포되기도 했다.

항일운동 지속적으로 이어나가

결국 최자혜를 비롯한 다수의 졸업생과 재학생들이 목포형무소에 대거 수감되고, 정상적인 학교 일정을 진행하지 못해 학교는 임시휴교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1920년부터 1922년까지는 졸업생을 배출하지 못하게 됐다.

하지만 4·8만세운동의 여파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921년 11월 13일 학교 기숙사에서 천귀례, 문복금, 김연순, 박복술, 곽선주, 김정현, 김나열, 박음전, 주유금, 김옥실 등이 모여 다시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그날 밤 그들은 기숙사에서 종이와 대나무로 태극기 수십 장을 제작해 가슴속 품고 만발의 준비를 했다.

다음날인 1921년 11월 14일. 정오를 알리는 오포 소리와 함께 각자 태극기를 들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학교정문을 박차고 나갔다. 이들은 남교동 방면으로 행진을 하고 이 과정에서 이남순, 이다애 등 몇몇 학생이 더 합류하게 됐다.

반면 제작한 국기를 들고 나왔으나 김나열, 김정애는 교문 앞에서 어머니의 애절한 하소연으로 물러나게 됐다. 목포 시내는 만세운동으로 광분한 수많은 시민들로 교통두절 상태에 이르렀고, 식민 지배를 하던 일본 경찰은 태극기를 압수하고 무력으로 진압했다.

결국 천귀례, 김나열, 박음전, 이남순, 문복금, 주유금 등 11명을 체포하여 최하 징역 6월을 선고해 옥고를 치러야 했다.

이후 정명여학교의 여학생들로 인해 목포에서는 항일독립운동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지난 1924년에는 시민들의 힘으로 성금을 모아 항일운동의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현재 목포 남교동에 위치한 구 청년회관에서는 일제의 눈을 피해 여성운동, 청년운동, 신간회 운동의 중심 역할을 했던 곳으로 항일운동을 이끌어왔던 역사적인 건물로 평가받고 있다.

▲목포 남교동에 위치한 청년회관. 이곳은 1920년대 항일운동의 보금자리로 이용됐다.
이렇듯 만세운동에 나섰던 정명여학교의 학생들의 업적은 지난 2012년 8월 다시 조명하게 됐다. 역사 속에 묻혔던 이들의 업적이 90년 만에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국가보훈처 발굴로 김나열, 곽희주, 김옥실, 박복술, 박음전, 이남순, 주유금씨 등 모두 고인이 된 7명이 애국지사로 선정됐다.

한편 여성독립운동의 산실인 정명여자중고등학교에서는 매해 4·8 독립만세운동 재현행사를 하며 그날의 함성을 되새기고 있다. 보통 남성 독립운동가는 많이 알려져 있지만 여성 독립운동가는 제대로 된 자료가 많지 않아 역사의 기록속에 몇 줄의 기록밖에 없다.

앞으로 드러나지 않은 여성 독립 운동가들의 활약상을 발굴하고 남성 독립운동과 똑같이 그에 적합한 예우가 필요 할 때이다./김다이 기자 

▲매년 정명여자중고등학교 학생들은 4.8독립만세운동 재현행사를 하고 있다.
▲목포 유달산 체육공원 안에는 목포의 3.1만세운동을 기념하는 독립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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