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나무에 내리는 비
겨울나무에 내리는 비
  • 문틈/시인
  • 승인 2013.01.30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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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비가 내린다. 수채화 속의 한 풍경처럼 을씨년스럽고 한가한 모습이다. 거리에는 행인은 별로 눈에 뜨이지 않고 차량들만 젖은 포도 위를 달리는 바퀴소리를 내며 오갈 뿐이다.
우산을 펴들고 나는 점퍼 차림으로 머리까지 덮어쓴 채 길을 나선다. 어디 딱히 갈 데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냥 겨울 빗속을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싶어서다. 마침 날씨도 겨울답지 않게 푹하다.
한길가로 벌거벗은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다. 겨울비를 맞고 서 있는 가로수들은 깊은 묵상에 잠겨 있는 듯하다. 어찌 보면 그 모습이 수도사 같기도 하다. 지난 여름의 푸른 잎들, 열매를 다 떨구고 빈 나뭇가지를 쳐들고 비를 맞고 서 있는 풍경은 자못 경건한 데가 있다.

나는 저런 겨울나무가 좋다. 현재형도 아니고 진행형도 아닌 완료형의 모습. 더 바랄 것도 없는 다 이룬 표정. 겨울나무에게서 어떤 깨달음 같은 것을 본다. 모든 바람을 내려놓고 허허롭게 서있는 나무의 모습에서 잡다한 욕망을 털어내지 못한 내 모습이 부끄럽기만 하다.
짐작컨대 겨울비는 실가지 끝까지 가로수를 적시며 봄이 멀지 않았음을 속살거리는 듯하다. 봄을 기다리는 것은 가로수만이 아닐 것이다. 이 겨울비를 맞고 있는 풍경의 모든 것들이 봄을 마음에 두고 있을 터이다. 사실은 나도 그 중의 하나다. 아침 밥상에 올라온 푸르고 달크작한 봄동을 먹으면서 내심 봄을 기다리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집을 나설 땐 아무 생각없이 나를 이끌고 이리저리 걸어볼 심산이었지만 도리어 생각이 더 선명해지는 것만 같다. 가령 아직도 봄이 오려면 하얗게 눈 쌓인 저기 먼 산등성이를 넘어와야 할 터인데 벌써부터 그리워하는 것도 그렇고. 막상 봄이 온다고 해도 봄을 맞을 채비도 안되어 있다.
아직 1월이다. 정이월 다 가고 3월이나 되어야 봄타령을 할 수 있으리라. 그렇다고 멀뚱하니 봄을 기다리고 있을 일이 아니다. 지금 나를 둘러싼 이 썰렁한 겨울도 내 차지가 아닌가. 사철이 다 나의 계절임을 알아본다면 굳이 멀리 있는 봄을 고개를 빼고 기다릴 것은 아니다.
이렇게 인적이 드문 거리에 추적추적 겨울비가 내리는 날은 봄과는 다른 깊은 생각을 재촉한다. 웅크리고 나 자신을 들여다보게 된다는 뜻이다. 고즈녁하게 겨울비에 적셔드는 풍경의 그 모든 것들이 다 나를 둘러싸고 포옹한다. 나를 위하여 준비된 것들이다.

이 풍경이 바로 내가 있는 무대다. 더 필요한 것도 없고 필요 없는 것도 없다. 정말 신묘막측(神妙莫測)한 일이다. 내가 겨울비 속으로 걸어가고 있다는 것. 그런 생각에 빠져들자 나도 모르게 두 팔로 나 스스로를 안아주고 싶어진다.
풍경과 나, 마을과 나, 자연과 나. 이 관계들 중에서 ‘나’를 빼면 아무것도 구성이 안된다. 나는 대단히 중요한 이 우주의 구성요소다. 겨울비 내리는 풍경 속에서 얻은 한 생각이다. 나는 결코 보잘것없는 존재가 아니다.
물리학에서 입자는 내가 관찰하는 순간에만 존재한다고 한다. 내가 여기 있으므로 네가 존재한다. 겨울비도 그렇다. 아니, 세상의 모든 것은 내가 여기 있음으로 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내가 없으면 세상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우주의 일부이자 전부다. 비는 주말까지 계속될 것이라 한다. 나의 겨울비 산책은 겨울나무와 함께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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