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시절 부부의[아무르],“신은없다!”
@여든시절 부부의[아무르],“신은없다!”
  • 김영주
  • 승인 2013.01.23 08: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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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 미제라블]을 500만 명이 보았단다. 이번 대선에 패배했다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등불을 비추어주는 힐링이 되었다는데, 난 ‘넘쳐나는 노래, 무너지는 감동’ 때문에, 글쎄? . . . 그 틈새에 [로열 어페어]와 [아모르]가 조용하게 화제를 모으길레, 오랜만에 광주극장에 찾아들었다.

[로열 어페어]는 제목처럼 덴마크 왕실에 일어난 스캔들이 영화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그 스캔들 앞 쪽엔 왕가의 내실에 드리운 어두운 사건들이 뒤 쪽엔 프랑스혁명보다 조금 앞서 나타난 계몽군주의 갈등이 뒤섞여서 이어진다. [광해]에서 보았듯이, 역사드라마는 어디까지가 Fact이고 어디까지가 Fiction인지를 알아야 하는데, 대중들은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래서 문제는 그 포인트가 대중재미냐 작품성이냐 이겠지만, 이 영화는 차암 어중간하다. 이 영화처럼 어느 한 쪽을 확실하게 잡아내지 못하면, 결국은 그 돈과 땀이 괜한 낭비에 지나지 않게 된다.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피아니스트]에 반해서, 그 이름만 보이면 관심을 갖는다. 2010년에 [하얀 리본]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뒤져서 찾아보았다. 겉으론 평화로워도 안으로 들어가면 스산하다. 작품성이 좋지만, [피아니스트]처럼 감동까지 오진 않았다. 대중재미는 밋밋하겠지만, 그 작품성을 아끼는 맘에 [아모르]를 만났다. 작품성이 매우 높다. 그래서 이번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고, 골든 글로브 외국어영화상을 받았으며, 아카데미영화제엔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각본상 외국어영화상 5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다. 역시나 대중재미는 없다. 그의 작품이 원래 그렇다. 인간의 이중성을 스산하게 잡아서 그 어둠을 리얼리즘 시각으로 그려가니, 대중재미가 있을 리 없다. 그래도 이번 [아모르]는 깊은 슬픔은 있어도 스산함이 겉으론 별로 드러나지 않아서 그나마 덜 부담스럽다. 그래서 사회파 영화임에도 보수파인 아카데미영화제가 5개 부문이나 노미네이트한 게 아닐까?( [피아니스트]는 스릴러 같은 대중재미가 조금 있다. 아무리 작품성을 추구하는 사회파 영화라지만, 이런 정도 재미쯤은 있어주어야 하지 않겠나? )

여든 시절에 접어든 늙은 음악가 부부의 사랑을 그렸다. 평화로운 노후를 보내던 그들의 일상에, 어느 날 아내가 갑자기 반신불수가 되면서 그녀에게 죽음의 문턱을 향한 어두운 그림자가 밀려온다. 아~! 내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답답해진다. 여든 살을 넘어서면, 누구나 쇠잔해지며 초겨울 가랑잎처럼 부서지고 삭아든다. 그 정도에 차이가 있고 놓인 처지가 다를 따름이다. 어려서부터 수많은 노인들을 보아왔지만, 그 초겨울 가랑잎처럼 쇠잔해져가는 슬픔의 깊이를 몰랐다. 울 엄니가 그 나이가 되어서야, 나도 겨우 비로소 알게 되었다.

<예고편> http://movie.daum.net/moviedetail/moviedetailVideoView.do?movieId=71136&videoId=39537&t__nil_main_video=thumbnail

엄니가 팔순잔치를 고향땅에서 치르고 싶다고 하셨다. 그 동안 병원은 가 본 적이 없고 약국도 어쩌다 감기약쯤 말고는 간 적이 없었다. 참 짱짱하셨는데, 팔순잔치 그날 고향집 뒷산에 외할아버지 산소를 내 부축으로 겨우 오르고 내리셨다. “아버님 뵙는 것도 오늘로 마지막이구나!” 울먹이셨다. 저으기 놀랐지만, 설마했다. 그리곤 한 겨울이 지난 뒤 어느 날, 계단에 오르다 넘어지셨다. 무릎관절이 부실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허리뼈가 두어 개 부서져서 병원침대에 그대로 누워계셨다. 변소길을 못가게 되었다. 하루 이틀 돌보다가 너무 힘들어서 ‘도우미 간호’를 받을까 생각해 보았다. 변소길 못가는 다른 환자들을 보았는데, 그 당사자들은 서로 이골이 나서 그러려니 할 지 모르겠지만, ‘구겨지고 추욱 늘어져 악취에 찌든 쓰레기인간’을 차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다. 한 번 두 번도 아니고, 하루 이틀도 아니고, . . . 울 엄니의 대소변을 도저히 남에게 맡길 수 없었다. 낮엔 집안 식구나 누님들이 돌아가면서 돌보고 해질 무렵부턴 내가 곁에서 돌보았다. 한 달쯤 지나니 변소길을 갈 수 있게 되었고, 석 달만에 집으로 돌아오셨다.

그런데 그걸로 끝난 게 아니라, 그게 시작이었다. 틈나는 대로 엄니 옆에 바짝 붙어서 봉양했으나, 내가 없는 동안 사건들이 일어났다. 무릎이 부실하니 그 뒤로 두어 번 허리뼈가 부서지는 일이 생기고, 끝내는 뇌출혈이 나타나서 수술하고, 이어서 치매가 다가오면서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그러다가 나 없는 사이에 된장국 끓이다가 집에 불이 날 뻔한 사건이 터졌다. 그 때서야 이건 효도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뒤돌아보니 그 사이 벌써 5년이 흘렀다. 무거운 죄송함을 등에 지고서 노인요양병원으로 모셨다. 그리곤 내 정상적인 생활이 회복되었다. 그렇게 다시 6년이 흘렀다. 오히려 건강해지셨고, 병실노인들과 간호사님들에게 ‘이쁜 치매’로 칭송받기까지 하신다. 다행이다. 매주 찾아뵙던 걸 최근엔 격주로 찾아뵙는다. 어쩌다 나이를 가르쳐 드리면, 그 때마다 깜짝 놀라신다. 눈을 휘둥그레 치뜨면서 “아흔 사~알! 속창아리 없제, 호박씨맹이로 고걸 으-디로 다 쳐 묵었다냐~?”

그 5년, 몸도 참 힘들었고 맘도 많이 무거웠다. 혹독한 겨울이 죽음이라면, 늙어간다는 건 가을이 저물어 가는 것이다. 그래도 단풍이 들 때까진, 늙어가는 게 서글프긴 해도 그 나름의 멋도 있고 맛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단풍이 지고 눈발이 휘날리다가 된서리가 치는 그 마지막 즈음, 여든 살 또는 아흔 살. 이쁜 년이나 미운 년이나, 잘난 놈이나 못난 놈이나, 부자나 빈자나, 가방끈이 기나 짧으나, 앞서거니 뒤서거니, 누구도 예외 없이 처참하다. 그걸 평등하다고 말하는 건, 그 처참한 슬픔의 깊이를 알지 못하는 철부지에 지나지 않는다. 그 즈음엔 장수가 복이 아니라, 느닷없이 죽는 게 왕~복이다. 느닷없이 죽지 않으면, 그 무너지고 바스러지는 처참한 모습을 남들에게 보여줄 수밖에 없다. 특히 변소길을 가지 못하는 사람이 매우 그러하다. 그 ‘구겨지고 추욱 늘어져 악취에 찌든 쓰레기인간’에서, 난 확인했다. “신은 없다!” ‘안락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음의 문턱에 선 그 어두운 이야기가 [아모르]에서 그대로 다시 살아났다. 작품은 훌륭한데, 맘이 너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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