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 박용구 기자
  • 승인 2013.01.10 15: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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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암 명노근 선생, 제13주기 추모식 거행

독재에 항거하고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힘썼던 고 명노근 선생의 13주년 추모식이 9일 금수장호텔과 5.18국립공원에서 열렸다.

금수장호텔에서 열린 추모식에서는 기도와 찬송, 이홍길 (사)알암명노근선생기념사업회 이사장 인사말, 문병란 시인의 추모시 낭송 등으로 진행됐다.

이날 부른 찬송가 502장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는 고 명노근 선생이 교육지표 사건으로 해직될 무렵 옥상 평상에 누워 불렀던 노래라고 알려졌다.

문병란 시인은 지난 대선 이후 썼던 시, ‘지고도 이기고 이기고도 지는 것’을 추모시로 바쳤다. 하늘나라에서 명노근 선생이 광주시민들에게 들려주었을 법한 시다.

2012년 12월 19일
우리는 지고도 이겼다.
93% 똘똘 뭉친 빛고을의 분노
民心 天心의 정의표 당당하였다.

(중략)

광주여, 고개 숙여
다시 울음 삼켜
쓸개주 마시며 귀기울이자.
“인생은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
다만 죽을 뿐이다. 죽을 뿐이다”
그리하여 다시 새싹이 튼다. 부활이 온다.

고 명노근 선생을 추모하는 이어진 시간에 이철우 목사는 “생전에 선생과 바둑을 둔 적이 있는데 평소에는 그렇게 인자하신 분이 바둑 둘 때만은 공격적으로 변했다”며 “지금도 그 모습 그대로 어딘가에 계신 듯한 느낌이 든다”고 회고했다.

김준태 시인은 “선생의 학위논문이 워즈워드의 ‘서곡’이었다”며 “프랑스혁명을 소재로 다룬 ‘서곡’을 논문으로 썼다는 것은 당신의 몸속에 이미 정의가 자리잡고 있었고, 정의에 토대를 둔 신학이었지 않는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제자 전홍준은 “65년 입학 당시 소장교수로서 말 그대로 착하고 부지런한 아들이었다”며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당당하고, 힘이 되고, 용기를 준 훌륭한 스승이었다”고 술회했다.

제자 정용화도 “평소 부모같은 따뜻한 장형으로서 역할을 다했다”며 “제자들이 기념사업회 일을 잘 해서 번창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추모식을 마친 유가족과 일행들은 다시 5.18국립공원으로 향해 명노근 선생 묘소에 참배하는 것으로 일정을 마쳤다.

고 명노근 선생은 전남대학교 교수로서 대학민주화 운동에 앞장섰으며 1980년 오월항쟁당시에는 수습대책위원으로 활동한 민주인사였다. 또한 광주YMCA 부흥에 앞장섬은 물론 한국YMCA연맹 지도자로서도 활동했다.

수차례의 연행과 구금, 두 차례의 긴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명노근 선생은 부인 안성례 여사와 다섯 아이들을 곱게 키운 아버지이기도 했다. 딸들에게 잔심부름 한 번 시킨 적 없고, 반찬타박을 하지 않았으며, 언제나 검소했던 그는 혼자 있어도 즐거워하고, 남들과 함께 있으면 더욱 즐거워한 외유내강의 인물이었다.

김준태 시인은 ‘명노근 평전’의 부제를 ‘하느님의 착한 아들, 광주의 작은 다윗’이라고 붙인 소회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알암 명노근 선생은 암울한 시대의 한복판에서 참으로 아름답게 자신과 이웃을 지킨 사람이다. 사랑과 평화와 진리의 파수꾼으로서 말이다. 그래서 나는 알암 명노근 선생의 평전 서브 타이틀을 하느님의 착한 아들, 光州의 작은 다윗으로 삼았는지 모른다. 백합이 흐드러지게 핀 샤론의 골짜기를 내달리는 소년 다윗, 그의 빛나는 두 눈동자에서 발화한 힘이 거인 골리앗을 때려눕히고 하느님의 아들로 거듭난 이야기를 되살려보고 싶어서이다”

이날 추모식에는 안성례 여사와 유가족을 비롯해 문병란, 이홍길, 전홍준, 김준태, 김상윤, 이철우, 정용화 등 50여명이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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