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야기 63 안휘성(安徽省)
중국이야기 63 안휘성(安徽省)
  • 강원구 한중문화교류회 회장
  • 승인 2013.01.10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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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구 박사

안휘성은 상해가 있는 강소성과 인접해 있고 양자강 하류의 안경(安慶)과 휘주(徽州)를 합쳐져 만들어진 곳으로 17세기에 생겼다. 가장 북쪽은 화북 평원의 연장으로, 지금의 하남성과 역사적 호흡을 같이 해 왔다. 중부 지역은 비옥하고, 인구가 밀집된 회하(淮河) 유역이다.
상(商) 나라를 건국한 탕왕(湯王)은 전설상의 신인 황제(黃帝)의 후손으로 지금의 안휘성 북부의 박주(亳州) 근처인 박(亳)에 수도를 정하였다. 전국(戰國)시대였던 기원전 278년, 서쪽의 진나라가 지금의 호북성을 거점으로 하던 초나라를 공격하여 땅을 빼앗았다.

이 때, 초나라의 난민들이 안휘성 중부에 있던 수춘(지금의 수현)으로 대거 이동하여 왔다. 기원전 221년에는 진나라가 전 중국을 통일한다. 후한시대에는 회하 남쪽은 대부분 양주에 속하고, 북쪽은 예주에 속했다. 한말에 수춘은 군벌 원술(袁術)의 거점이 되었다. 원술은 한 때 스스로 황제를 칭하였으나 얼마 가지 않아 조조에게 점령당했다.
금나라가 북중국을 지배하게 되면서 안휘성은 또 다시 갈라지게 되는데, 이번에는 회하를 경계로 하여 금나라와 남송이 각각 북쪽과 남쪽을 지배하였다. 만주족의 청나라는 1644년 중국을 정복하고 난 뒤, 남직예를 지위를 변화시켜 강남성(江南省)으로 한다.

1666년에는 강남성을 강소성과 안휘성의 둘로 나눈다. 이것이 안휘성의 시작이고, 이 때의 경계는 지금까지 거의 변화가 없다. 1946년에는 성도가 안경(安慶)에서 합비(合肥)로 옮겨졌다. 합비(合肥)는 동비와 서비를 합쳤다는 의미로 합비라 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1949년에는 안휘성이 잠시 동안 양자강을 경계로 하여 완북(皖北)와 완남(皖南)으로 나누어지기도 하나 1952년 복귀된다.

박주(亳州)의 주요 인물은 삼국지의 주요 인물인 조조(曹操), 유방(劉邦)을 도와 한나라를 세운 장량(張良), 천하 제일의 의술가 화타(華佗)가 있었던 곳이다. 얼마전 TV드라마 ‘신의’에서 김희선이 옛날로 돌아가 사용했던 수술도구 등을 화타가 사용했다는 드라마 구도를 보면 김희선이 다시 한번 그 이전의 과거로 올라가 화타가 되었을 것이라는 암시를 한 적이 있다. 박주는 3천여년의 긴 문화 와 역사의 흔적 그 냄새가 아직도. 살아 숨쉬고 있는 곳이다.

봉양(鳳陽)에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朱元璋)이 태어난 곳이고, 서현(舒縣) 출신으로 적벽대전에 공을 세운 주유(周瑜)가 있고, 유방과 항우(項羽)의 해하성(垓下城) 전투는 고사성어 사면초가(四面楚歌)로 유명하다. 회녕(懷寧) 출신으로 공산당의 레닌으로 불리어진 진독수(陳獨秀)가 있으며, 서예가인 등석여(鄧石如)가 있다. 적계(績溪)현은 문학가인 호적(胡適)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또 중국철학의 한 축을 이루는 노자와 장자, 청렴한 관리의 표상인 포청천, 인쇄술 발명가 필승도 안휘성 출신이다.

상해 등 중국의 대도시에서 가정부 등 막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출신을 물어 보면 안휘성 출신들이 많다. 안휘성은 경제적으로 낙후된 곳이어서 그곳 사람들이 대도시로 몰려들어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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