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잎의 내력은 춥다
풀잎의 내력은 춥다
  • 문틈/시인
  • 승인 2013.01.10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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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창 지하운동을 하고 있을 것이다. 겉으로 보면 대지는 엄혹한 침묵에 빠져있는 듯하지만 그 땅 속에서 풀들은 새봄을 마련하기 위해 언 뿌리를 부비며 서로 그물코 같은 연대로 푸른 물감을 생산하며 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푸른 풀들이 어느 날 갑자기 대지에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찬 겨울 속에서 봄을 선언할 지하운동을 한 끝에 일제히 대지 위에 출현하는 것이다. 겨울이 추우면 추울수록 새봄의 봄빛이 더욱 푸르른 것은 다 이런 연유가 있어서다.

탄허 스님은 한 겨울 속에 봄이 있다고 말했다. 동짓날부터 하늘의 기운이 땅으로 내려오고, 하짓날부터 땅의 기운이 하늘로 뻗친다고 했다. 그래서 동지 이후로는 따뜻해지고 하지 이후는 점점 추워진다고 했다. 이것이 우주의 천리라는 것이다. 나무들조차도 발을 동동거리는 추운 겨울 속에 봄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 것인지 모른다.
영국 시인 셸리가 ‘겨울이 오면 봄도 멀지 않으리’라고 노래한 것은 참으로 희망찬 이야기다. 우리네도 벌써부터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어떤 고난을 당해도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화려한 봄을 마련하기 위해 온갖 간난을 견뎌냈던 것이다. 우리의 역사는 어쩌면 견뎌냄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손이 시린 겨울날에는 그런 봄 같은 것은 아예 생각하지도 않는다. 뉘라서 겨울에 봄을 그리며 희망을 품겠는가. 당장에 발 뻗고 잘 아랫목이 그리울 뿐이다. 그저 영원히 겨울이 계속될 것만 같다. 하지만 때가 되면 봄은 오고야 만다. 그렇다고 뒷짐 지고 가만히 앉아서 봄을 기다릴 수는 없는 일이다.
그 연약한 풀들이 땅 속에서 서로 손을 굳게 잡고 스크럼을 짜고 체온을 나누며 겨울을 견뎌내 마침내는 대지에 푸른 함성을 터뜨리는 것을 우리는 곧 보게 것이다. 그것이 희망이다. 검은 흙을 뒤집고 연약한 푸른 빛이 터져 나오고 마침내는 푸른빛이 들불처럼 산과 들을 덮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때 세상은 혁명에 성공한 봄의 나라가 되고 만다.

지금은 한 겨울. 나무들도 발을 오그리고 겨우 숨만을 들이쉬며 에너지를 아낀다. 오소리도 굴속에서 긴 잠에 빠져 있다. 가만 보면 봄을 기다리는 것은 땅 속의 어린 풀들만이 아니다. 산골짜기에 얼어붙은 얼음장도 봄이 오면 다시 졸졸졸 흐르며 잊었던 노래를 시작할 것이고, 가시넝쿨들도 가지마다 색색깔의 꽃을 피우려고 조용히 작업을 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어째서 이런 놀라운 기적들이 한 겨울 속에서 준비되고 있는지 참으로 놀랍지 않은가. 혹독한 추위로 시련을 견뎌낸 풀과 꽃과 나무 들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한갓 상징이 아니다. 인생살이가 점점 힘들어 가는 세상이다 보니 사람들이 쉽게 포기하고, 쉽게 절망에 빠지고, 급기야는 우주 같은 목숨을 끊는 일이 잦다.

만일 세상 일이 뜻대로 안 풀린다면 지금 당장 땅에 귀를 대고 들어볼 일이다. 얼어붙은 땅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들릴 것이다. 죽은 듯한 장미나무 가지를 손톱으로 살짝 긁어보면 푸른 물이 실가지까지 돌고 있다. 살아 있는 것은 살아야 한다. 살아 있는 것보다 더한 희망은 없다. 겨울을 지내온 모든 풀들의 내력은 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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