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덮인 마을을 보며
눈에 덮인 마을을 보며
  • 문틈/시인
  • 승인 2013.01.03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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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길이 눈에 덮여 발목이 푹푹 빠진다. 면으로 가는 길도, 장으로 가는 길도, 우체국으로 가는 길도 눈에 덮여 보이지 않는다. 산도 들도 마을도 하얀 눈 속에 파묻혀 있다. 어린 새들이 자는 대숲도 눈에 덮여 있다.
나는 지금 눈 속에 잠들어 있는 마을이 깰까봐 도둑처럼 가만가만 기침소리도 삼키며 눈이 내린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볼 양으로 눈밭에 발목을 묻는다. 수북이 눈에 덮여 있는 마을, 어느 한 사람도 깨어나지 않은 눈 속에 푹 잠들어 있는 마을을 보는 것이 내가 오래 기다려온 보고 싶은 풍경이었다.

다들 마을이 눈에 덮인 줄도 모르고 아직 새벽잠에 빠져 있을 것이다. 이따가 아침이 되어 잠에서 깨어나면 온통 은색으로 일변한 세상을 보고 아, 하고 어린이처럼 감탄사들을 발할 것이다.
대체 사람들이 설경을 바라보고 할 수 있는 말이란 하나도 없다. 그저 티 없이 아름다운 겨울의 풍경에 압도되어 이것이 꿈인가 할 뿐. 그렇다. 아침 설경이 보여주는 천상의 풍경에 무슨 인간의 말이 필요할 것인가.

나는 언제까지나 이렇게 마을이 하얀 눈에 덮여 있기를 꿈꾼다. 이렇게 눈에 푹 파묻혀 있는 마을에는 맑은 꿈이 떠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꿈, 이를테면 한창 맛이 도는 살얼음이 살짝 낀 동치미를 나누며, 막 쪄낸 시아버지 생신 시루떡을 돌리며, 다음 달 노총각 결혼잔치에 시금치나물을 추렴할 생각을 하며, 대동세상을 꿈꾼다.
나는 이런 꿈, 뭐 대단치도 않은 이런 꿈이 마을 바깥으로 나가는 길이 막힌 폭설이 내린 세상에서 가능하다고 본다. 그래서 눈 내린 우리 마을을 더 좋아한다.

눈밭에는 내가 내는 발자국 말고는 사람의 발자국이라곤 하나도 없다. 아니, 어쩌다 들쥐란 놈들이 마을로 들어왔다가는 나간 흔적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그런데 이렇게 온통 세상에서 마을 뒷산에 사는 새들, 오소리 같은 짐승들은 어떻게 지낼까.
마을이 눈을 헤치고 깨어나면 이장한테 말해서 산에 사는 것들에게 먹이라도 좀 건해주자고 얘기를 해보아야겠다. 그 생명들도 우리가 꿈꾸는 대동세상의 어깨동무들이니 말이다.

나는 눈에 덮인 마을을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한 바퀴 돌면서 귓불이 시린 줄도 잊고 행복감에 빠진다. 내 가진 것 서푼어치라도 다 내놓고 내 것 네 것 없이 마을 사람들이 한 가족처럼 살아가는 그런 세상이 아침이 오면 곧 열릴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내가 살아왔고 살아갈 마을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해보는 것은 마을이 눈에 덮여 한 지붕 아래로 모여든 모습이 나를 시인의 감성으로 이끌어간 탓이려니 한다.

눈이 내린 새벽 아직 사람들은 잠 속에서 맑은 꿈을 꾸고 있다. 마을의 굴뚝들에서는 마을 사람들의 꿈이 연기처럼 가늘게 피어오른다. 그것들은 하늘로 날아올라가 새벽별이 되어 반짝거린다.
이 신새벽 내가 마을을 한 바퀴 돌면서 마을을 위하여 새해 기도를 한 줄을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왜냐하면 실상 그것은 나를 위하여 한 것일테니 말이다.

이제는 알 것도 같다. 새벽 눈은 하늘이 내린 축복이란 것을. 한해도 추운 눈 내린 새벽 마을이 하늘의 축복에 감싸여 있다는 것을. 그러므로 겨울 눈 속에 살아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은총이란 것을 기어이 누구 한 사람이라도 붙들고 말해야 할까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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