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여성운동사24>시대정신 일깨운 여류 소설가 박화성(2)
<광주전남여성운동사24>시대정신 일깨운 여류 소설가 박화성(2)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3.01.02 18: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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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침없이 현실 폭로, 고발부터 항일운동까지

▲소설가 박화성 초상화
“아, 당신은 이 세상 크기보다 더 큰 자유의 씨를 뿌린 선구자였소.”

전남 목포 출신 문인 차범석이 지난 2004년 박화성 탄생 100주년을 맞아 쓴 ‘씨 뿌리는 여성 아! 박화성’의 일부다. 그녀는 개화기 목포에서 태어난 한국 문학의 선구자며 여성항일운동을 펼쳐왔던 인물이다.

1920년대부터 여성에 대한 의식이 극도로 보수적인 이 땅에서 남성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목포출신 여류소설가 박화성(朴花城). 목포에서 이러한 선각자를 가졌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며 전남의 여성권익 향상에 이바지한 인물이기도 하다.

근우회를 통해 여성항일 구국운동

근대 초기 여성 가운데 뛰어난 지식인이었던 그녀는 1925년 이광수의 추천으로 ‘추석전야’라는 작품을 통해 젊은 나이에 등단했다. 자유분방한 기질을 지니며 정신여학교에 재학 중인 박화성은 1926년 엄격한 학교 분위기를 탈피하려는 듯 서울의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학업을 이어나갔다.

일제하 강점기에 여성의 신분으로 학교를 다니기 위해서 상경했다는 점에서도 선각자 기질이 타고났다고 엿볼 수 있다.

그녀가 표출해놓은 소설과 글로써 민중들에게 시대의식을 일깨웠던 박화성은 동경 유학길을 올라 일본여대 영문과를 다니게 됐다. 재학 중에는 일제의 추악한 만행에 맞서 활발한 여성항일 구국운동을 펼쳐왔다.

줄곧 사회주의 서적을 탐독해왔던 그녀는 1928년 1월 결성된 여성항일구국운동 단체 ‘근우회’ 도쿄지부에서 활동을 했다. 창립대회에서 그녀는 모두를 이끄는 위원장의 역할까지 맡아 리더십을 보여준다. 그녀의 사상적 성향은 사회운동을 하는 도중 투옥된 오빠 박제민의 영향이 큰 탓이었다.

박화성은 오빠의 사회운동 이야기를 담은 ‘북국의 여명’이라는 소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후 1930년 오빠의 절친이었던 김국진을 알게 되고 비밀 결혼식을 올렸지만 7년 뒤 파경의 아픔을 겪게 된다.

그러던 도중에 박화성은 여자로서는 처음으로 동아일보에 장편 ‘백화’를 연재하면서 장편작가로서 역량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녀가 집필했던 동화 ‘엿단지’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당히 당선되고, 식민지 현실을 그대로 빗대어 그렸던 단편소설 ‘헐어진 청년회관’으로 세인의 주목을 받아왔다.

하지만 일제의 만행은 노골적으로 점점 극에 달했다. 우리민족 고유의 언어를 쓰지 못하게 창씨개명, 우리말 말살정책 등으로 고통과 핍박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여기서 멈출 박화성이 아니었다.

▲목포문학관 2층에 위치한 '박화성 문학 기념관'에 복원된 박화성의 집필실

여성 권익 향상에도 나서

사실주의에 입각하여 현실 문제를 깊이 있게 파헤치는 것을 중요시 여겼던 그녀는 ‘하수도 공사’, ‘홍수 전후’ 등 가난한 농민들의 고된 삶을 다룬 사회성이 강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또한 목포로 낙향을 한 뒤 후배 양성, 일제강점기에 맞서 광주의 유치원 교사, 야학 교사, 영광에서 교사 등을 하면서 여성의 권익을 향상시키는 일에 관심을 갖고 동분서주 뛰어다녔다.

목포에서 사업을 하던 천독근(千篤根)과 다시 부부의 연을 맺고 그녀의 핏줄이었던 세 아들과 맏며느리 모두를 문단에 입문시키면서 ‘문학 가족’을 이루기도 했다.

그녀의 아들은 바로 동아일보 편집위원이자 문학평론가인 천승준 선생이 큰 아들이며, 소설가이자 시인으로서 민족문학작회의 상임고문을 맡고 있는 천승세 선생이 둘째, 서울대 영문학 교수인 천승걸 선생이 셋째 아들이다.

그녀는 1969년 건강이 악화되어 위 제거 수술을 받고 그녀는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게 됐다. 하지만 박화성은 ‘달리는 아침에’를 문학지에 싣는 등 작가로서 무서운 집념과 사명감을 잃지 않았다.

해방 이전 민족의식이 강해 민족들에게 스스로 살 수 있는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내용을 주를 이루었지만 광복 이후에도 굵직굵직한 소설을 집필하고 펜을 놓지 않았다.

늘 약자의 입장에서 서있었던 그녀는 뛰어난 문학적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민국문화훈장 및 한국 문학상 등 수많은 상을 휩쓸고 제 1회 예술원상을 수상하여 목포의 명예를 드높이기도 했다.

암흑기 시절 박화성은 외롭고 어려운 길을 끊임없이 소설로 써내려 나갔고, 일제강점기의 조선 노동자 착취와 조선 여성들의 인신매매 등을 약자에게 용기를 불어 넣어주는 글로 명성을 날렸다.

이렇듯 박화성의 소설들은 일제강점기에 우리말 말살 정책으로 인한 고통을 겪는 그들의 참상을 정직하게 묘사하고 현실 고발, 현실 폭로를 통해 늘 약자의 입장에서 그들을 대변하고 옹호하면서 거친 사회상을 고발해왔다.

▲소설가 박화성의 흉상
목포를 비추는 빛 ‘박화성’

한편 한국문학 여성 선각자 1세대였던 그녀는 20여 편의 장편소설과 100여 편의 단편, 500여 편의 수필과 시 등의 작품을 남긴 채 1988년 8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게 됐다. 이후 그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현재 목포시 용해동에 ‘박화성 문학기념관’을 세워 아직도 목포를 밝게 비추고 있다.

목포항과 신안 앞바다를 바로 지척에 둔 목포문학관에 건립된 박화성 흉상과 기념비는 ‘박화성 문학 기념관’을 찾는 사람들로부터 “정말 정교하다”, “살아 있는 듯하다”며 감탄이 끊이질 않는다.

전국에서 최초로 문학인 기념관으로 건립된 이 기념관은 전시품의 면모에서도 단연 국내 최고에 버금가며 평생 문학에 심취해온 그녀의 생전의 생활상을 그대로 복원하여 서재, 거실 등 60여 년 동안 써온 일기, 문필의 생애를 마감한 마지막 필적, 육필원고 등 귀중한 문학적 자산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김다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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