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 하얗다. 일시에 온 세상을 하얀 시트로 덮어 놓은 듯하다. 밭고랑도, 나무숲도, 마을길도 하얀 눈으로 덮여 있다. 마치 이 세계가 사실은 거대한 설치 미술작품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나는 창으로 눈에 덮여 있는 종요로운 눈의 나라를 내다본다. 이 아침엔 나라와 나라 사이의 국경선, 그 국경선에 쳐진 가시철조망 같은 것들도 하얀 눈에 지워져 있을 터이다.
이 아침 온 세계가 눈의 나라로 하나 되어 있다. 그렇게도 열망하던 하나의 나라를 눈이 와서 실현시켜 보인 것이다. 이런 놀라운 장면을 보면서 나는 저기 먼 북방의 어디 개마고원 협동농장 같은 데 사는 사람에게라도 무작정 전화를 걸고 싶어진다. 남과 북이 어디 있어요. 우리는 지금 눈의 나라로 통일되어 있는 거예요. 눈에 덮여 있는 조선반도를 보라고요. 정말 아름답지요.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옆 어디 통나무집에 사는 원주민에게도 국제전화를 걸고 싶어진다. 눈이 와서 세계가 한 이불보를 둘러쓰고 있는 모습을 보라고, 당신네 나라와 우리나라가 어디 있느냐고, 국경선 같은 것이 어디 있느냐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다.
그런 생각을 더하고 있으면 눈물이 나올까봐 나는 당산나무 근처 병관이네 밭쪽으로 눈길을 돌린다. 눈에 덮인 채 가만히 밭고랑에서 숨쉬는 어린 보리싹, 봄동 들을 두 눈으로 더듬어 본다. 하얀 눈에 덮여서 안 보이지만 눈을 헤치면 푸른 잎들이 싱싱한 모습을 하고 나타날 터이다.
눈이 와서 모든 것들을 수북히 덮어버린 풍경을 보고 있노라니, 말하자면 이 아침 겨울은 온 세상, 내가 남쪽, 북쪽, 철조망, 마을길, 대숲, 국경선 하며 수많은 사물들을 하나하나 나누고, 분리하고, 편 갈라 부르던 이름들이 얼마나 부끄럽고 멍청한 분별인가를 깨닫게 해준 것이다. 본디 사물은 이름들이 없었고,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한 형제자매였음을 눈에 덮인 세계는 분명히 깨닫게 해주고 있다.
그렇다. 만일 내가 나와 세계를 대치시킨 채 세계가 돌아가는 꼴에 분노하고, 절망하고, 괴로워하면서 살아간다면, 그리하여 그 세계를 부수지 못해 화가 나 있다면 이 아침의 겨울눈을 생각해볼 일이다. 겨울눈에 덮여 있는 세상을 한번 볼 일이다.
시베리아의 거대한 찬 대기가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흩어져 한반도로 내려온 바람에 이 땅의 기온이 영하로 내려갔고, 그래서 눈이 많이 온 것이라고, 이런 기상대의 언어로 눈 덮인 세상을 보아서는 안된다. 작은 나무의 가시들까지 은박을 하듯 감싼 하얗고 부드러운 눈의 기적은 나는 물론이고, 내가 기르는 강아지와, 지난 봄을 꽃피운 장미나무에게도 전하고 싶은 전우주적인 메시지의 표현이라고 나는 믿는다.
눈이 왔어요. 모두 나와서 눈 나라를 보셔요. 마을 이장네 징을 울려서 이렇게 크게 외치고 싶다. 이 아침 내 목소리는 한 마장도 더 멀리 들릴 것이다. 눈 온 날 아침은 그래, 모두가 시인이 되어 자는 아기를 울리지도 말고, 모든 인류를 첫날의 신랑, 신부처럼 축하해주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