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수, 신사실파(新寫實派) 1세대 ‘살아있는 전설’로 남아
백영수, 신사실파(新寫實派) 1세대 ‘살아있는 전설’로 남아
  • 정인서 기자
  • 승인 2012.12.06 14: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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母子像 작가로 익숙한 백영수 화백의 회화 70년
내년 2월 24일까지 광주시립미술관 무각사로터스갤러리
▲ 7일 광주시립미술관 개막행사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백영수 화백

어린이 그림잔치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구도와 색칠이 생각난다. 사람이나 대상은 선으로 그리거나 색으로 칠한 후에 바탕은 한 색이나 두 색 정도로 모두 칠한다. 얼굴 모습은 거칠고 선이 투박하다. 크레용이나 크레파스로 그리다보니 어린이 수준에서는 그런 정도도 다행이다.
이러한 동심을 가진 어른이 그림을 그린다면 어떤 모습일까? 유화물감으로 동심을 가진 어른이 그린 그림은 크레용이나 크레파스보다는 질감이 좋고 매끄러울 것 같다. 물론 색감도 균일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익숙하게 동심으로 그려본 그림

나이가 들면 어린 아이가 된다는 말이 있다. 올해 나이 91세. 다시 어린아이로 되돌아간 백영수 화백의 작품은 늘 어린이의 동심을 담았다. 가족이 그립고 새와 꽃 그리고 나무가 정겨운 모습이다.
크로키 형태로 대상의 특징만 찾아내 그린 이들 작품은 사실적이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사실적인 느낌을 갖게 만든다. 그의 화업 인생 70년 동안 그린 작품을 일별해보면 마치 어디선가 본 듯한 그림들 같다.
붓터치나 구도, 선의 처리 등도 눈에 익은 모습이다. ‘신사실파’라 부르는 김환기 유영국 장욱진 이중섭 이규상 등의 작품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어 더욱 그런 느낌이 든다.

신사실파(新寫實派)는 자연이나 일상, 현실 등을 소재로 삼지만 작품으로 표현할 때는 추상적인 방법도 사용하여 자유자재로 구상과 비구상을 넘나드는 예술관을 말한다. 즉 낡은 ‘사실’을 버리고 추상기법을 도입해서 시대를 꿰뚫자는 의미였다.
한국 추상미술 1세대인 김환기, 유영국, 이규상이 1947년에 결성했고 장욱진, 이중섭, 백영수씨 등이 나중에 함께 했다. 그들은 오랜 세월을 함께 했으니 지난 2007년 환기미술관에서 가진 ‘신사실파 60주년 기념전’에 나온 작품을 보면 더욱 그런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인생의 변화과정에서 그들의 감정이 일치했던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 무제 water_color_on_paper.33x20cm 1953
1945년 이후 활발한 창작활동

백 화백은 1922년 수원에서 태어났으나 2세 때 부친이 타계하면서 어머니 손을 잡고 외삼촌이 있는 일본 오사카로 건너간다. 1940년 오사카미술학교에 입학해 1학년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 그해와 이듬해 연이어 교토시 미전에 입선하는 등 실력을 돋보였다.
1944년 어머니와 함께 귀국해 목포고등여학교와 목포중학교 교사로 2년간 근무했다. 1945년 목포 조흥은행 회의실에서 개인전을 가진 그는 이듬해인 1946년 조선대 총장의 요청으로 미술학과를 창설했으나 이내 지역 작가들과의 불화로 떠나고 만다.

이무렵 학생교재용으로 <미술개론>을 만들고 전쟁 전에 출판했다. 수많은 미술교사들을 이 책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당시 다른 '친구'들에 비해 입지가 좁았던 그는 이 책이 그의 다른 입지를 굳혀주기도 했다.

1947년 서울로 올라간 그는 화신백화점에서 개인전을 갖는 등 77년까지 전쟁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매년 서울을 중심으로 개인전을 가졌고 특히 77년에는 서울 대구 마산 광주 등 전국 순회전을 갖는 등 활발한 창작활동을 벌였다. 또한
그리고 뉴욕을 거쳐 파리로 건너가 정착하면서 35년간의 파리생활 속에서도 국내에서의 개인전도 게을리 하지 않아 그의 왕성한 창작열을 선보였다. 94년에 위암수술을 받고 투병생활을 벌이기도 했으나 천진한 그의 마음 때문인지 아직도 그는 건재하게 활동 중이고 지난해 영구 귀국하여 의정부에 기거하고 있다.

근현대미술 초석 다져 재조명돼야

백 화백은 ‘한국 근현대미술사의 살아있는 전설’ 혹은 신사실파 동인으로 활동한‘추상 회화의 선구자'로 불린다. 더불어 우리나라 근현대미술의 초석을 다지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다만 그에 대한 평가가 다른 신사실파 ’친구‘들과 다르게 미미한 것에 대해 김희랑 광주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는 전시서문에 이렇게 쓰고 있다.
“35년이라는 긴 기간 파리에서 활동한 탓으로 국내활동이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신사실파 회원들과는 달리 현존 작가인 관계로 재조명 작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스스로 나서지 않는 작가의 성격과 대학에 적을 두지 않아 제자가 없는 등 여러 가지 정치적 이유들 또한 작용되었을 것으로 추측해 본다.”

백 화백의 작품은 크게 4기로 나눠볼 수 있다. 1960년대 이전, 1970년대, 1980년대와 90년대, 그리고 2000년대 이후이다.
1960년대 이전에는 ‘조춘(1969)’과 ‘장에 가는 길(1953)’, ‘게(1953)’에서 보듯이 화면 전체에서 대상의 특징적인 면을 부각하고 나머지는 생략하면서 자신의 사색의 흔적들을 마치 추상적인 분위기로 그려낸 듯하다.
이 시기의 작품은 전체적으로 안정되고 평온한 느낌을 갖는다. 오히려 수채화로 그린 작품 ‘무제(1953)’는 요가하는 듯한 여인의 모습이지만 노란색의 화려한 바탕이 30대 초반의 그의 열정을 보여준다.

 

▲ 새 1975 60x71.5cm 캔버스에 유채

▲ 창가의 모자 Oil on Canvas 60 x 73 cm 1988
르네상스기 성모마리아와 아기예수 느낌

1970년대는 전체 구도와 색감에서 큰 변화를 보여준다. 무슨 일이 있었던 사람처럼 바탕은 어둡고 칙칙하며 벽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대상은 선이 아닌 면으로 처리되고 새와 모자(母子)가 주로 등장한다.
특히 ‘새(1975)’는 하얀 원피스를 입은 여인이 많은 새들과 교우하는 듯한 모습으로 특정한 대상을 보고 그렸다기보다는 영적인 이미지, 정신성과 내면성을 상징적으로 반영하는 형상으로 비쳐진다.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는 가운데 자신의 방황을 표출했다고 할 것이다.

주요 소재로는 작가 자신을 상징하는 남자 아이와 대리 자아로서의 새, 정신적 안식처인 모자상, 그 밖에 자신의 정서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개, 정자, 나무 등이 있다. 일반적으로 새는 자유와 평화, 하늘세계와 인간세계를 연결해 주는 매개자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그는 늘 어린아이처럼 꿈을 꾸고 있다.

1980년대와 1990년대는 프랑스에서의 안정된 생활을 바탕으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모자상은 종교적인 영감을 받은 것으로 해석된다. 이 무렵 천상(天上)과의 교감을 상징하는 모자상에는 교회의 건물이나 창문 등이 배경에 등장하는 등 기독교 성화와 같은 인상을 준다.
특히 모자상은 성모마리아가 아기예수를 안고 있는 르네상스기의 작품들과 유사한 구도를 갖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산치오, 산드로 보첼리 등의 대표작인 ‘성모마리아와 아기예수’작품을 보면 같은 느낌을 갖는다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게다.

▲ 백영수 화백
모든 것 초탈한 평화 행복 찾아

2000년대는 나이가 80대에 이른 시기여서 모든 것을 초탈하는 시기이다. 공자는 나이 70이면 마음이 하고자 하는대로 하여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라고 했는데 시대변화를 감안하면 이제는 80이 넘으면 그런 경지인 듯싶다.
단순한 공간해석으로 마치 만화의 한 컷처럼 넓은 면과 선으로 형상만을 강조한 ‘불르쥬풍경(2002)’과 ‘실내(2012)’등이 등장하는가 하면, 밤하늘을 청색으로 나타내고 별빛을 십자모양으로 무수히 그려낸 ‘밤하늘(2005)’은 세상에서의 인연을 상징하고 있다.

그를 생각하면 모자상이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함께 등장하는 남자아이, 새, 개, 나무와 정자 등 향토적이고 서정적인 소재들은 그리움과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동양적인 정서에 맞닿아 있다.
백 화백의 작품은 부드럽고 깊이 있는 색조들은 보는 이에게 평온하고 따뜻함을 안겨준다. 여기에 단순화되고 함축적인 작품들은 그가 그리는 사랑과 평화, 행복의 참의미라는 느낌을 갖게 만든다. 그의 전시가 내년 2월 24일까지 2개월간 광주시립미술관과 무각사로터스갤러리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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