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야기 58 ‘신안선’ 출발지..신라인 대거 유입
중국이야기 58 ‘신안선’ 출발지..신라인 대거 유입
  • 강원구 한중문화교류회 대표이사
  • 승인 2012.12.06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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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구 박사

고려를 방문한 서긍(徐兢) 등 200여명은 이듬해 귀국 뒤에 그 유명한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약칭 ‘고려도경’이라는 책을 지어 황제에게 헌상한다. 송나라의 사신으로 고려에 왔다가 1개월간 머문 후에 쓴 이 책은 40권에 달하는 것으로 고려의 실정을 기록한 것이다.

사실 이 기록으로 보면 그는 송나라의 간첩이었다. 그는 고려도경의 첫머리에 “앞으로 송나라가 고려를 침공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지리와 역사, 그리고 풍속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제가 조사한 자료를 참고 하시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라고 적었다. 고려의 풍물이나 역사, 지리에 대해 자세한 서술을 남겼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서긍의 뇌물공세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중요 군사기밀은 아무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서 누구나 다 볼 수 있는 성곽이라던지 궁중의 경비 배치 등 만을 파악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당시 송나라의 국력으로 고려까지 배를 타고 건너와 침공하는 것은 꿈도 못꾸었기 때문에 고려도경은 별로 도움이 못 되었다 한다.

이에 의하면 서긍 일행이 고려를 향해 당시 송나라 수도 개봉(開封)을 출발한 것은 1123년 3월 14일. 보통은 요동반도를 따라가는 육로를 택하지만 당시 금(金)이 한창 흥성하던 때라 해로를 이용했다.
이들을 태운 신주(神州)라는 배는 5월 26일 심가문(沈家門)을 출항해 6일 만에 소흑산도에 도착하고, 서해 연안항로를 따라 계속 북상해 6월 12일 예성항에 입항했다.

서긍 일행은 돌아갈 때는 역 코스를 밟았다. 그들의 출항지였고 귀항지였던 심가문은 지금의 중국 절강성 주산(舟山)시 보타구(普陀區)에 있으며, 심청과 관련된 곳이다.
비단 이뿐만 아니라 남송과 고려의 교류에서 영파는 그 창구와 같은 구실을 했다고 다. 심지어 일본으로 가다가 신안 앞바다에 좌초한 ‘신안선’도 출항지는 영파였다. 하지만 영파의 이런 역사는 통일신라시대까지 시대를 더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헌덕왕 8년(816) 신라에서 대규모 기근이 발생하자 절동(浙東) 지역으로 먹을 것을 구하러 들어간 신라인이 170명이나 되었다고 하며, 이듬해 10월에는 신라에서 당에 사신으로 보낸 김장렴(金張廉) 일행이 표류 끝에 영파에 도착했다고 한다.
나아가 신라 진성여왕 10년(896)에 작성된 진철대사(眞澈大師) 이엄(利嚴)의 비문에는 대사가 입절사(入浙使)인 최예희(崔藝熙)를 따라 입당하다가 표류 끝에 영파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기록들에 나오는 절동은 지금의 영파를 중심으로 하는 절강성 동해안 일대다. 이는 그만큼 이 무렵에 영파를 중심으로 하는 지금의 절강성 일대가 두 지역 문화교류의 창구였음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중당(中唐) 시대를 대표하는 대시인 백락천이 생전에 펴낸 시집인 백씨장경집(白氏長慶集) 서문에 의하면 백락천 시집을 구입한 신라상인이 영파항을 이용했다는 기록도 있다.

영파 인근 주산에는 중국 4대 불교 성지 중 하나로 관음 신앙의 발상지로 간주되는 보타산이란 곳이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에서 비롯된 보타산 관음 신앙은 그대로 신라로 유입되어 의상대사가 지금의 강원도 양양에 역시 같은 관음 신앙의 본거지인 낙산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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