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여성운동사 21>한국의 독립여성운동가 김마리아(1)
<광주전남여성운동사 21>한국의 독립여성운동가 김마리아(1)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2.12.06 08: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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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선언문 뿌린 ‘3·1운동’ 숨은 공로자

▲김마리아 선생
“조선 사람으로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오. 남자가 활동하는데 여자가 못할 이유가 있소?”

일제의 모진 고문과 핍박 속에서 취조하는 일경에게 당당하게 대답한 여성이 있었다. 바로 독립운동가 김마리아(金瑪利亞)다. 일제강점기 시절 만세운동의 숨은 공로자이자 여성의 교육이 전무했던 시절 여권 신장을 위해 헌신한 위대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민족 계몽운동 펼친 집안 환경에 자라

그녀는 수피아여학교의 교사로 광주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지만 호남과 서울, 그리고 황해도에서 주요 활동을 펼쳤다. 김 선생은 항상 “여자도 남자와 같이 활동해야 해”라고 생각하며 우리 역사에 굵직한 자취를 남겼다.

그녀는 1892년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소래마을 대지주였던 아버지 김윤방(金允邦)과 어머니 김몽은(金蒙恩)사이에 세 자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세례명이기도 한 그녀의 이름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부친이 지어주신 것이다.

그녀의 부친은 경제적으로 부유하였을 뿐 아니라 일찍이 기독교에 입교한 뒤 교회와 학교를 세워 민족 계몽운동에 종사하던 인사였다. 그러한 가정환경에 자라온 터라 어린 시절부터 여성 지위향상이 중요하다고 여겨왔다.

주목할 점은 그녀의 집안은 개화운동과 애국운동, 특히 항일구국운동에서 단연 돋보이는 집안이었다. 큰삼촌 김윤오(金允五)는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를 세우고 개화교육운동을 전개했다. 막내삼촌 김필순(金弼淳)은 민족지도자 안창호와 결의형제간이었고, 애국지사들과 긴밀한 동지관계였다.

고모 김구례(金求禮)는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서병호의 부인이며, 또 다른 고모인 김순애(金純愛), 김필례(金弼禮) 역시 독립운동과 여성교육에 이바지한 사람이었다. 이로 인해 남달리 의지가 강하고 정의감이 넘치며 총명했었던 김마리아에게 가족배경은 그녀가 민족과 나라를 구할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한 밑거름이 되었다.

나라를 빼앗겨 비분강개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지만 그녀가 다섯 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열 세살 때에는 어머니마저 그녀의 곁을 떠나게 됐다. 늘 성적이 우수하고 과묵하며 침착한 성품을 지녔던 김 선생은 언니와 고모들이 먼저 입학해 다니고 있는 덕에 정신여학교에서 잘 적응할 수 있었다.

작문시간에는 항일적인 글을 곧 잘 써서 당시 일본의 탄압 상을 신랄하게 비판하곤 했다고 한다.

19세가 되던 해인 1910년 큰언니 김함라(金函羅)를 비롯해 22명과 정신여학교 제 4회 졸업생으로 별 탈 없이 졸업할 수 있었다. 그렇게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을 더욱 키워갔던 그녀는 졸업 이후에는 큰언니 함라가 근무하던 광주의 수피아여학교 교사로 부임하면서 교육 계몽운동에 동참하게 됐다.

그러나 그 해 8월 대한민국은 일제의 완전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김마리아는 국권 상실로 인해 민족적 비분을 가슴속에 더욱더 새기게 됐다. 그녀는 민족문제 해결에 여성들이 앞장설 것을 역설하며 정신여학교로 돌아가 교사를 전임하며 비분강개를 삼켜야 했다.

2.8독립선언 참여로 3.1운동까지

하지만 이 시점에 김 선생은 “국권이 상실된 것은 민력이 부족한 때문이니 나라를 다시 찾기 위해서 교육을 확대해 국민의 실력을 양성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야”라고 믿으며 동경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유학 중에는 한인 YWCA활동에 참여하고, 유학생 중심으로 형성했던 조선독립청년단 조직에서 여자의 몸으로 참여하게 된다.

이런 배경 속에서 1919년 3.1만세운동의 전초전이라고 할 수 있는 2.8독립선언에 참여하고 이 길로 일경에게 두 차례 체포가 되어 조사를 받기도 했다. 2.8독립 선언 이후 조선에 독립운동의 불을 붙이기 위해 비밀리에 속속 귀국을 했다.

김마리아도 졸업을 포기하고 ‘독립선언서’ 10여장을 베껴 기모노로 변장을 하여 오비에 몰래 숨기고 부산항으로 들어오게 된다. 3.1만세운동에서 여성들이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녀가 목숨 걸고 삼엄한 일경의 눈을 피해 국내에까지 소식을 전할 수 있었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

김마리아는 광주를 첫 임무지로 선택하고 수피아여학교 교편에 있었던 관계로 알고 있던 동료들과 작은고모 김필례를 통해 광주 여성들에게 2.8독립선언문을 배포하기 시작했다./김다이 기자

▲2.8독립선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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