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여성운동사 20> 여성교육의 선각자 김필례(2)
<광주전남여성운동사 20> 여성교육의 선각자 김필례(2)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2.11.29 04: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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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바친 ‘여성교육’과 ‘계몽운동’

YWCA와 여전도회 등 여성운동에 힘써온 김필례(金弼禮) 선생은 민족을 사랑하는 여성 교육자로서 평생을 몸을 아끼지 않았다. 살아 생전 수피아여학교와 정신여학교에서 봉직을 하며, 3.1운동 시절과 해방 이후 수피아의 복교 당시를 함께 지내온 그녀는 누구보다 여성 계몽운동에 의식이 남달랐던 것도 사실이다.

그녀는 엄격한 여성교육을 통해 기독교 가정을 훌륭하게 이루는 현모양처가 되도록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예절바르게 부모를 공경하고 남편 내조, 자녀 올바르게 기르는 가정여성의 교육에 힘써왔다.

3.1만세 운동의 숨은 공로자

▲김필례 선생
1918년 당시 시대에는 늦었지만 28세의 나이로 최영욱과 결혼 이후 전라도 광주로 내려오게 된 김필례. 광주에서 뼈저리게 느낀 것은 우리나라 여자들이 제대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고, 남편에게 천대까지 받고 어두운 생활하는 것을 지켜보게 됐다.

그리하여 1919년부터 수피아여학교에서 교편을 잡고서 3.1운동을 겪으면서 선도적인 역할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같은해 2월 일본에서 2.8독립선언문 낭독과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조카인 김마리아가 고모인 그녀를 찾았다.

김 선생은 김마리아가 동경에서 몰래 숨겨서 가져온 ‘독립 선언문’을 남편과 같이 복사하여 전국에 배포한 사실은 3.1운동의 숨은 공로자였다고 할 것이다. 김마리아는 <수피아 100년사>에서 “불같은 조국애와 민족애가 고모의 영향으로 깨닫게 되어 무서운 잠재력을 갖게 했다”고 술회한다.

한편 첫 아들을 낳았던 그녀는 감사의 표시로 금정교회에 훌륭한 종을 기증하고, 부인 조력회를 맡아 전도와 봉사에 앞장서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수피아 100년사>의 당시 회고에 따르면 “처음으로 남녀 청년들로 찬양대를 조직하고, 직접 반주를 맡아 풍금을 쳤었지”라고 그녀는 말했다.

여성교육 위해 야학교사 나서

김 선생은 지방의 문맹 여성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는 야학을 열기도 했다. 동구 광산동의 옛 시청 자리에 있었던 흥학관(興學館)에서 야학교사로 참여하다 나중에 여수 여성운동의 선구자가 된 임춘자(林春子)를 길러냈다. 흥학관은 당시에 최명구(崔命龜)가 회갑잔치를 않고 그 비용으로 세웠다.

▲김필례 최영욱 부부
자연스레 야학의 운영기금, 광주의 유치원 기금을 모금하기 위해 직접 조달에 나섰다. 때때로 교회를 빌려 직접 출연하기도 하는 음악회를 열고 여성 문맹퇴치에 심혈을 기울였다. 광주에서 최초로 음악회를 개최했던 그녀는 정율성의 외숙모이기도 하다.

1922년에는 서울에서 한국 YWCA 창립을 위해 김활란(金活蘭), 유각경(兪珏卿)과 함께 전국 순회 책임자가 됐다. 그리하여 광주에서 김함라((金函羅, 남궁현 목사 부인), 양응도(梁應道, 김창국 목사 부인), 임자혜(김강 장로 부인) 등과 함께 그해 11월 5일 기도를 통해 광주 YWCA창설한 것으로 전해진다. 양응도는 다형 김현승 시인의 어머니이다.

그녀의 머릿속엔 항상 “하루빨리 여성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권리를 찾아야 해”라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았다.

한편 1924년에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여성교육의 명문인 아그네스 스캇 대학을 졸업(1926)학하고 뉴욕 콜럼비아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1927년 다시 귀국하게 된다.

그녀는 애정이 깊었던 수피아여학교로 돌아와 1947년까지 교감, 교장을 맡아오며 여성교육에 지도자 역할을 해왔다. 그런 가운데 여성운동이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계열로 분열되자, 신간회(新幹會)의 자매 단체로 1927년 근우회(槿友會)를 조직하였다. 암흑 같은 일제강점기에도 꿋꿋하게 여성교육의 선구자 역할을 해온 것이다.

그러던 도중 6.25사변이 발생하게 됐다. 미국에서 마음을 잡고 귀국 후 의사로 지내왔던 남편 최영욱 박사는 한국전쟁의 실상을 알리고 전도여행을 하는 도중에 공산군에게 잡혀 사망하게 됐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듣게 됐다.

▲김종필 총리가 김필례 여사와 YWCA지도자들에게 훈장을 전하고 있다. @1972년 9월11일 동아일보
교육 위해 서울여자대학 설립

슬픔을 씻어내기 위해 이후에는 모교 정신여학교로 돌아가 교장을 하면서 지내오다 그녀의 꿈이기도 했던 지금의 ‘서울여자대학’을 세우는 업적을 남겼다. 5.16군사쿠데타가 발생하고 군부세력이 정권을 장악하자 사회 각층의 구악을 척결한다는 명목으로 들쑤시던 시절 김 선생을 정신여자중고등학교의 교장직에서 물러나게 했다.

그렇게 교장직은 물러났지만 김 선생은 여성교육에 아낌없는 성원과 사랑을 보냈다. 직접 가르칠 수는 없게 됐지만 재단 명예이사장으로 줄곧 지내오다 1987년 7월 30일 93세의 나이로 눈을 감게 됐다.

이렇듯 김필례 선생은 우리나라의 암흑기였던 일제강점기에 국가나 사회에서 천대받고 무시당하던 사람들을 찾아 한 사람, 한사람 가르치고 키워내어 나라의 요긴한 일꾼이 되도록 인도해주는 여성교육의 중요한 위치에 서 있던 인물이었다./김다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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