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웰과 종교 (7)
오웰과 종교 (7)
  • 이홍길 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 고문
  • 승인 2012.11.22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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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길 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 고문
오웰에 대한 단편적 소개를 하면서도 오웰과 독자들에게 미안한 것은, 그에게서 느끼는 감동은 엄청나나 그의 치열한 휴머니즘과 깊은 의식세계를 따라잡지 못하는 필자의 한계이다. 어렴풋한 느낌으로 그를 의식과 실천의 균형을 놓치지 않으려 했던 지식인으로 어림잡아 볼 따름이다.

오웰의 친구이자 전기 작가인 우드콕은 ‘오웰은 상징이 되기엔 너무 혼자였고 성자가 되기엔 너무 분노했다. 행동 중에 사상을 만들고 문학을 통해 행동의 틀을 갖춰나갔다’고 평하고 있었다. 유명한 영국 노동당 좌파의 대부인 베번의 부인이자 정치인이었던 제니 리는 오웰에 대한 인상을 ‘민주사회주의라는 대의를 위해 이 생의 마지막 소유물까지도 희생할 준비가 돼있는 사람.

그의 불안의 일단은 자신이 사회주의자이면서 뼛속 깊이 자유주의자인 점’으로 회상하고 있었다. 46세로 1950년 생을 마감한 오웰은 기독교의 내세에 대한 믿음을 불신하고 교회에 비판적이었지만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단테의 신곡을 읽었고 그의 당부로 장례는 영국국교회 의식으로 치러졌고 교회묘지에 묻혀 졌다. 오웰은 그의 급진적 정치노선에도 불구하고 도그마를 쫓는 이념형 지식인은 아니었다.

내세관을 믿지 않았지만 그것에 수 천년동안 익숙했던 사람들이 내세관이 소멸된다면 엄청난 심리적 공황을 맞게 될 것이고 기독교의 내세관을 대신할 새로운 선악체계가 마련되지 않으면 문명의 파탄은 제어하기 힘들고 미래에 대한 구상도 희망도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역시 그는 영국 지식인이었고 그만큼 경험주의적이었다. 오웰과 동시대를 살았던 케인즈는 평생을 기독교라는 미신을 공격하며 살았지만 말년에 종교적 신념이 떠난 자리에 그것을 대체할 보호체계가 없음을 안타까워하고 ‘만일 기독교가 없다면 도덕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나는 기독교를 부수려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었다.

유한한 인간의, 너무나도 자명한, 한계를 자각하면서 유물론적 인식이 초래할 공황을 보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지식인들의 종교에 대한 인식이 오웰과 케인즈처럼 모두 경험적이지만은 않았다.

포이어바흐는 종교 없이도 도덕이 가능하며 기독교가 일반교양이나 문화의 기초가 될 수 없고 과학이 대신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종교도 인간이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한 수단으로 기독교의 본질은 인간심정의 본질에 불과한데도 정치와 야합해서, 당시 독일민중의 통일과 민주화 욕구를 차단하는 걸림돌이 되므로 그 권위와 위신을 해체할 필요가 있었다.

초자연과 신비를 거듭 강조해도 종교가 인간사에 존재하는 문화현상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 존재의 항구성과 인간정신에 미치는 폭넓은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그 변천은 특정 공간의 일반적 조건 안에서 규정되어, 영국과 독일과 한국의 공간조건의 다름에 따라 종교의 형상이 다르고 역할이 다르게 된다.

시대조건과 그 시대를 사는 인민들의 요구에 따라 시대정신이 형상화되는데 궁극적으로 종교의 역할도 시대정신에 조응할 밖에 없을 것이다. 영국 기독교의 변천사는 영국지식인들에게 경험적 인식을 하게 만들어 오웰도 그 예외가 아니게 된다.

루터의 종교개혁과 독일농민전쟁의 모순은 포이어바흐로 하여금 종교의 인간조건을 탐구하게 만들고 한국교회의 대형화와 물신화는 깨달음을 통한 주체적 신앙을 모색하게 만들고 있음을 볼 수 있지 않은가? 오웰의 종교에 대한 태도를 통해서 경험과 관용이 중요함을 새삼 인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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