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가는 뒷모습
가을이 가는 뒷모습
  • 문틈 시인
  • 승인 2012.11.22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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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수길에 가을물이 든 낙엽들이 휘날린다. 인도는 멧방석을 깔아놓은 것처럼 낙엽으로 수북하다. 그 낙엽진 길을 나는 혼자서 걷는다. 꽃이파리처럼 낙엽들은 바람에 날려와 내 품으로 달려든다. 가을의 화려한 잔치에 초대받은 나는 가을에게 아무 인삿말도 할 수가 없다.

나는 걷는 길을 멈추고 곱게 물든 낙엽 한 잎을 주워 바라본다. 흡사 가을이 내게 보낸 엽서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나는 뭐라 쓰였는지 낙엽을 열심히 들여다 본다. 그 모양새며, 색깔이며, 잎맥이며, 나무에서 막 떨어져 나온 잎줄기에 필시 무슨 문자 메시지가 쓰여져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눈이 맑지 않아 읽을 수가 없다.

이 낙엽을 컴퓨터 시디 드라이버에 넣고 읽어볼까, 하는 생각이 순간 머리를 스쳐간다. 아니다. 아무리 컴퓨터가 만능이래도 낙엽에 쓰여져 있는 이 글을 해독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은 오직 숱한 계절을 살아온 연륜과 자연을 경배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읽어야 할 자연이 기록한 경전일 것이기에.

순간 나는 꽃이파리처럼 분분히 휘날리는 이 낙엽들이 어쩌면 계절이 일을 마치고 발하는 무수한 감탄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본다. !!! 감탄사. 나는 낙엽에 쓰여진 메시지를 해독해보려 끙끙대는 동안 내 속에 무엇인가 찬란한 빛이 스며드는 것을 느낀다.

무어라 형용할 길이 없는 감격, 황홀, 밤을 새며 세계문학전집을 독파하던 젊은 날의 감동과는 또다른 무엇인가 완료형의 아우라를 보는 듯한 느낌. 그러자 길가에 줄지어 선 나무들이 한 그루 한 그루 모두 성스럽게 보인다. 곁에 서 있는 한 그루 은행나무로 발걸음을 옮겨 두 팔로 안아본다. 그것이 내가 가을에게 보내는 인삿말이다.
가을은 사시사철 가운데 신이 현현하는 유일한 계절이다. 어디선가 신이 나타나서 맑은 눈을 하고 가을을 보고 있을 것 같기에, 가을이 해낸 찬란한 성과를 손에 쥐어보고 미소를 지을 것 같기에, 그리고는 신은 가을과 동행하여 먼 어딘가로 갈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가을을 신의 계절이라고 불러보는 것이다.

시인은 노래한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라고. 가을 나무들을 보라. 열매와 잎들을 다 떨구고 시방 감사기도를 드리려는 모습 같지 않은가. 나도 무릎을 꿇고 신에게 감사를 드리고 싶다. 내가 세상에 살아 있음에, 내가 아름다운 가을을 바라보고 있음에, 내가 스스로 감탄사가 되는 것을 느끼고 있기에.

가을은 길바닥에 낙엽을 흩뿌리며 성큼 성큼 언덕을 넘어서 간다. 가을이 가는 길에는 눈이 시리게 푸른 하늘과 비단 같이 고운 단풍과 손짓하는 흰 구름과 침묵으로 돌아간 빈 들판과 바다를 달려가는 여윈 강물과 구부러진 고샅길이 있다.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가을의 뒷모습을 나는 한참 바라본다.

인생살이란 것도 저래야 쓸 것이다. 주어진 세상일을 마치고 손을 탁탁 털고 가는 모습. 굳이 낙엽이라는 엽서에 쓰여진 글을 애써 읽을 필요가 없을 듯하다. 가을이 보여주는 뒷모습이 이미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 알 것만 같다. 너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너는 감사해야 한다고, 너는 그러므로 축복을 받은 것이라고. 아무도 내가 왜 낙엽 한 잎을 들고 여기 서 있는지를 알지 못할 것이다.텅 빈 마음으로 나는 가을이 가는 뒷모습을 언제까지나 바라보며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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