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유신정권과 사법살인 '인혁당 사건'의 진실
박정희 유신정권과 사법살인 '인혁당 사건'의 진실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2.10.25 09: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형선고 18시간 만에 사형집행하는 인권 유린
박근혜, '민혁당'으로 말하는 등 사과 진정성 의문 제기

1975년 유신정권시대 역사상 ‘사법 살인’이란 오점을 남긴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이하 인혁당 사건)’가 37년 만에 다시 수면위로 떠올랐다. 바로 최근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후보의 역사의식에 대한 논란이 불거지면서이다.

하지 말라는 것도, 금지곡도 많았던 유신정권 박정희 대통령의 딸이기도 한 박근혜 후보는 지난 9월 24일 과거사 관련 기자회견을 하는 자리에서 ‘인혁당 사건’을 ‘민혁당 사건’으로 잘못 발언하는 등 사과의 진정성이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박 후보, 사과 진정성 의문 제기

이를 두고 시민들 사이에서는 대통령 후보인 사람이 인혁당 사건 실체를 제대로 뭔지도 모르고 사과한다고 하는 게 아닐까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중들은 ‘인혁당 사건’에 관련하여 박 후보의 잘못된 발언에만 집중하고, 젊은 세대와 심지어 그 시대를 살아왔던 대다수는 사건의 전말이 어떻게 된 것인지, 최근 평가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 실체를 알지 못한 경우가 많다.

이를 알아보는 자리가 마련됐다. 4.9통일평화재단, 광주인권평화재단, 전남대 5.18연구소의 주최로 24일 전남대 사회과학대학 1층 별관에서 ‘박정희 유신정권과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해 서중석 교수(성균관대 사학과)의 초청강연이 열렸다.

강연에 앞서 서 교수는 “광주는 우리나라의 정치 1번지이며, 80년 민주항쟁을 이끌어 왔기에 한국 민주주의 정치에서 선도적 방향계 역할을 해왔다”며 “이번 선거에서도 광주가 큰 역할을 하지 않을까 싶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 서 교수는 “우리나라는 정말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 1위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60년부터 90년대 초반까지 학생운동을 30여 년 동안 해온 것은 세계 최고 수준이며, 또 다른 경우도 찾아 볼 수 없다”고 말했다.

2차례 벌어진 인권탄압 사건

‘인혁당 사건’은 지난 1964년 1차, 1974년 2차 두 차례에 거쳐 발생했다. 먼저 1차 인혁당 사건 당시의 정치적 상황은 한일회담 재개로 한일회담 반대운동이 전국적으로 거세게 확산되고 있었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반대운동 확산을 차단하기 위해 비상계엄령 선포를 내리기도 했다.

사건은 광복절을 하루 앞둔 1964년 8월 14일, 당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현재 국정원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불씨를 붙였다. 김 정보부장은 “북한의 지령을 받고 국가변란을 기도한 남한 내 지하조직 ‘인민혁명당’을 특수반국가행위로 적발한다”고 발표하면서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처음 인혁당 사건 연행자 47명에 대해 증거가 불충분해서 검찰에서는 기소를 거부했지만, 한옥신 담당검사는 반공법 위반으로 13명을 재기소했다. 1심에서는 그 중 도예종과 양춘우에게만 징역 3년과 2년을 선고하고, 나머지에게 무죄를 선고했지만 2심에 가서는 뒤바뀌게 되었다.

1965년 5월 29일 2심 재판부는 1심의 판결을 뒤엎고 피고 13명에게 전부 유죄판결을 내리고, 1965년 9월 21일 대법원 역시 상고를 기각하고 2심을 확정했다.

한편 이들은 조사과정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한 사실까지 폭로되어 밝혀져 인권탄압이라는 충격을 줬지만, 이렇게 1차 인혁당 사건은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이후 박정희 정권은 장기집권을 위해 69년 ‘3선 개헌’을 통과시키고, 72년 10월 17일 영구집권을 위해 유신헌법을 제정하기에 이르렀다.

박정희 정권, 유신체제 민주주의 탄압

73년 8월에는 김대중 납치사건을 벌여 국내외 여론이 크게 악화되고, 이를 지켜본 학생들은 개강과 동시에 대대적인 시위를 펼치고, 고등학생까지 시위에 가담하게 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렇듯 1974년 2차 인혁당 사건 당시는 유신 저항운동이 전국적으로 거세게 일기 시작한 때이다. 숨죽이고 있던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은 유신반대 투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투쟁은 걷잡을 수도 없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박정희는 또다시 폭력적인 정치적 결단을 내리게 된다.

박 정권은 긴급조치 4호까지 발동하여 반유신데모를 금지시켰지만, 결국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 채 10여 년 전 ‘인혁당 사건’을 다시 이용하여 용공조작사건을 꾸며낸다.

1974년 4월 25일 중앙정보부는 “북한의 지령을 받은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조직이 민청학련의 배후에서 학생시위를 조종하고 있다”고 또 다시 발표하며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민청학련 관계자와 인혁당재건위 사건 관련자 1천 24명을 연행해갔다.

바로 희대의 사건. '2차 인혁당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군법회의는 조사 과정에서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과 학생들을 구분하여 재판을 진행하고, 공판조서가 조작되는 일이 발생했다. 민청학련 관계자 대부분 감형 또는 형집행정지로 석방시켰지만 남아있는 구속자들은 철저히 통제된 상태에서 가족들의 면회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재심 기회 없이 18시간 내 사형집행

게다가 박 대통령은 “민청학련 사건은 인혁당이 뒤에서 조종한 것이 명백한데 일부 정치인들은 이를 부인하고 오히려 이들을 동지니, 애국인사라고 하는데 이렇게 해도 법에 안 걸리는가?”라며 관계자를 질책했다. 이는 명백히 삼권분립에 어긋난 발언이었다.

박 대통령은 재판이 끝나지도 않은 사건을 사법부로 통제하려고 했고 이는 즉각적인 효과를 발휘했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은 인혁당 사건 관련자 23명의 상고를 기각하고, 도예종을 비롯한 8명은 사형, 나머지는 무기징역 등 중형을 선고했다.

사형 선고를 받은 8인 도예종, 서도원, 우홍선, 이수병, 송상진, 하재완, 김용원, 여정남은 재심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은 채 사형이 선고되고 18시간 만에(4월 9일) 반인권적인 사형을 당하게 됐다.

이에 서중석 교수는 “더 정확히 말하자면 14시간 만에 이루어 졌다”고 얘기한다. 이렇게 민주열사들은 가족들의 면회도 금지된 채 역사 속에 억울하게 소리 없이 사라져버렸다. 이후 유족들은 간첩의 가족이라는 손가락 짓을 면치 못하고 살아와야했다.

한편 이 사건은 국제사회에서 사법사상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강력한 규탄발언이 쏟아져 나왔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사법자협회’에서는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규정하고, 미국마저도 국무성 대변인 명의로 ‘사형에 대해 유감스럽다’고 발표했다.

왜곡된 역사 바로잡기까지

이후 인혁당 사건의 유족들은 끊임없이 오랫동안 진실규명을 촉구해왔다. 1998년에는 소위 인혁당 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위원회가 만들어졌다. 국가는 2000년에야 ‘인혁당 사건’의 진상규명에 나서기 시작했다.

2002년에는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인혁당 사건은 수사 착수부터 재판까지 철저하게 조작됐다”며 “당시 최고 권력자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되고, 정권 유지의 필요에 따라 수사방향을 미리 결정하여 조작한 사건이다”고 밝혀 재심을 청구했다.

결국 사건이 발생한지 ‘32년’만에 판결은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다. 2007년 1월 23일 사형수 8인에 대해 전원 무죄판결을 내리고, 나머지 생존자와 관련자에게도 무죄판결을 내리게 됐다. 이들은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됐지만 8인이 세상을 뜬 이후에야 왜곡된 과거사를 바로잡을 수 있었다.

또한 이 사건은 사법 역사상 ‘사법 살인’이라는 오점을 남긴 희대의 판결로 남게 됐다. 그러나 사회 일각에서는 법원판결에도 불구하고 인혁당 사건의 숭고한 삶을 부정하려는 세력이 남아있다.

이러한 행위는 민주주의와 자주적 통일 그리고 평화세상을 기원했던 인혁 열사들의 억울한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행태다. 80년 민주항쟁으로 민주주의를 얻게 되어 앞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인혁열사들의 진정한 명예회복을 기리며, 올바른 역사의식을 지녀야 할 듯싶다./김다이 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