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의 내려감을 살핀다 (2)
조지 오웰의 내려감을 살핀다 (2)
  • 이홍길 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 고문
  • 승인 2012.10.19 10: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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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길 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 고문
영국의 명문 이튼학교를 졸업한 조지 오웰은 19세에 버마의 식민경찰이 되었다. 당시 버마 인구는 1,300만명, 경찰은 13,000명이고 영국의 경찰 관리는 90명이었는데 오웰은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식민경찰 관리는 성공한 입신인 셈이었는데 그는 5년 후 사임을 한다. 같은 환경이었다면 자신도 저질렀을 바로 그 일을 했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잡아 감옥에 넣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었다.

식민경찰은 제국주의의 추악한 소행에 가담한 셈으로 그는 가해자로서 속죄해야 할 엄청난 죄의 무게를 의식하였다. 그는 버마를 떠나 영국생활을 시작한 이후 이전의 신분에서 내려져서 빈민들 속에 섞여 들어갔다. 호텔에서 접시를 닦고 노숙을 하고 호프를 따고 손수레를 끌고 부랑자들과 함께 떠돌면서 그의 식민경찰의 죄의식을 털어내고 있었다. 그는 모든 형태의 출세를 의심했고 연간 몇 백 파운드를 버는 것도 인생의 성공으로 치부, 거부하였다.

그는 버마 식민경찰의 경험에서 가해와 피해의 관계에 대한 관점을 배우고, 그 틀로 당시의 자본주의 사회를 관찰했다. 그는 귀국한 이후 영국의 빈민들에게서 버마 원주민의 모습을 보았다. 영국의 빈민은 바로 백인 원주민이었다. 인종의 장벽처럼 계급 장벽도 도저해서 쉽게 무너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인간에 대한 모든 형태의 지배를 부정하고 억압받은 자들 속으로 직접 들어가는 것만이 압박자에 대항하는 길이었다. 실패만이 유일한 덕목이었고 모든 출세는 약자를 짓밟는 것과 마찬가지로 추한 것이었다.

품위를 갖췄다고 하는 모든 것은 밑바닥 인생들의 혹독한 노동현장과 일상적인 가난에 빚진 것이었다. 세상의 모든 혁명과 의거들이 초래한 영광과 혜택을 살아남은 사람들이 누리는 것을 열사들과 투사들의 희생에 빚진 것이었다.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평등 없는 친밀성은 더 이상 지탱 될 수 없는 위선적인 것이었다. 그는 내려가 신분을 낮춤으로써 평등의 조건을 만들었고, 그럼으로써 평등 없는 친밀성을 인식할 수 있었다.

전기 작가이자 오웰의 친구인 우드콕은 “나는 살아온 인간과 글로 표현된 인간의 모습이 이처럼 일치하는 작가를 결코 만난 적이 없다”고 술회하였다. 오웰의 내려감을 보면서 “성서의 계시가 증언하는 바 예수가 인간의 모습을 택해 구체적으로 땅으로 내려 왔을 때에야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길을, 열 수 있었던 것과 같은 이치를 파악”하는 평자도 있었다. 좌파 정치인인 제니 리는 오웰을 “민주사회주의라는 대의를 위해 이생의 마지막 소유물까지도 희생할 준비가 돼있는 사람”으로 회상하고 있었다.

예비학교 시절 가난한 집 소년의 설움을 겪고 버마 경찰시절 접했던 현지인들의 가난이 그의 속죄의식을 그토록 끈질기게 촉발했던 것이다. 그는 스페인 내전에서 민주주의를 옹호하기 위한 인민전선의 전사로도 용약 참가하였으나 스탈린주의자들의 전체주의에 실망하여 이후 반스탈린 언론활동에 매진하기도 하였다.

오웰은 가난에 대한 많은 글을 남겼다. 가난이 주는 최악의 효과는 정신의 붕괴로, 굶주림이 영혼을 좀먹는 것을 지적하여 “위가 비어있으면 사고가 멈추고 다음 끼니가 보장된 것이 아니므로 다음 식사를 걱정하는 외에 어떤 생각도 할 수 없다”고 가난의 참담함을 지적하고 있었다.

그는 실업이라는 글에서, 실업을 자본주의의 체제적 문제로 인식하였다. 실업은 자본주의와 대규모 산업경쟁의 부산물로 노동자의 희생을 초래하기 마련이었다. 오웰의 민주사회주의가 가난에서 벗어난 노동자들의 동지적 자결에 있었음을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가난이 굴레가 되지 않는 한국 노동자들의 미래를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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