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역사탐방 8> 박관현 열사
<근현대역사탐방 8> 박관현 열사
  • 정인서 기자
  • 승인 2012.10.12 17: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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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민주화 꽃피운 그의 정신 살아남아
경찰이 박 열사 시신 가족 몰래 고향에 묻어

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가 마련한 근현대역사문화기행은 참으로 빠듯한 시간 속에서 진행됐다. 드디어 하루 일정의 마무리를 박관현(1953~1982) 열사의 생가를 탐방하는 자리에서 갖게 됐다. 박 열사의 누나인 박행순 씨와 매형이 처음부터 이번 기행단에 참가했고 이 자리에서 모두에게 얼굴을 드러냈다.

버스가 도착한 곳은 영광군 불갑면에 있는 박 열사의 생가와 가까운 마을 입구에 세워진 동상이 있는 곳이었다. 오늘 탐방을 마무리하는 의미도 있거니와 시대적으로 30년 전의 일이었다. 박 열사가 우리 곁을 떠난 날이 1982년 10월 12일 새벽 2시 10분경, 29살의 나이였다. 그래서 이 글을 쓰는 내 자신도 더욱 숙연해진다.

모두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자연스레 동상 주위로 모여들었다. 누구랄 것도 없이 얼른 나서서 동상 주변에 빼꼼 돋아 있는 풀들을 맨손으로 뜯었다. 박 열사는 고무신에 두루마기를 입고 오른 손을 힘주어 쳐들며 큰 소리로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군사독재를 타도해야 한다’라고 외치는 듯 했다.

우리 기행단은 박 열사의 동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역사의 언저리가 아닌 역사를 이끌고 간 그 열사의 모습을 사진에 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의 집으로 향했다.
박 열사의 가족들도 대부분 고향을 떠나 광주 등으로 옮겨 살아온 터라 생가만 뎅그러니 남아 있었다. 박 열사의 생가는 강항로 15-12번지이다. 강항(姜沆, 1567~1618)은 정유재란 대 영광의 의병장이었고 왜적에 끌려가 일본 성리학의 뿌리를 내린 호남의 인물이다.

녹슨 철대문으로 금방이라도 들어올 듯

박 열사의 생가 철대문은 붉게 녹슨 채로 열려 있었다. 대문 안쪽에 이미 풀들이 돋아 언젠가 박 열사가 이 문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났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느낌을 받았다. 대문을 지나니 널찍한 마당이 있고 오른쪽엔 다 낡은 비닐하우스가 있었으며 왼쪽에는 박 열사가 태어났다는 조그만 터가 있었다. 예전에 방 한 칸이 있었는데 불에 타 무너졌다고 한다.

그리고 박 열사의 부친이 집 앞에서 기다리다가 우리 일행을 맞아주었다. 부친께선 연세를 드신 데다 건강이 좋지 않아 병원에서 요양 중이다. 그런데 이날 우리 기행단이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일부러 불편한 몸이지만 휠체어를 탄 채 병원에서 나와 맞이해 준 것이다.

박동기 선생이 박 열사의 부친을 일행들에게 소개했다. 이번 기행의 해설을 맡은 이종범 조선대 교수가 박 열사 부친과 따뜻하게 악수를 나누며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눴다. 박 열사 부친의 얼굴에는 온통 아들을 향한 그리움이 주름마다 담겨있는 듯 했다. 그리고 박열사의 누나가 당시 박 열사의 죽음과 시신을 당시 경찰이 고향 선산에 몰래 묻고 갔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박 열사는 우리에게 어떻게 기억이 될까? 박 열사는 5·18 직전까지 광주시민과 학생들의 반독재투쟁을 주도했다. 그는 1980년 전남대총학생회장으로 활동하던 5월 16일 저녁, 구 전남도청 앞 광장 분수대에서 열린 민족민주화성회 때 광주시민의 가슴을 뒤흔드는 연설로 시민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5월 18일 새벽 선배들의 권유로 예비검속을 따돌린 그는 한동안 여수 돌산에 피신했다가 서울로 올라가 삼양동과 공릉동의 섬유공장 노동자로 살다가 1982년 4월에 신군부에 의해 체포됐다. 죄목은 내란중요임무종사 혐의이다. 그는 모진 고문을 받았고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여기에서 신영일과 같이 5․18 진상 규명과 교도소 처우 개선 등을 주장하며 세 차례에 걸쳐 40여일간의 결사적 옥중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그러다가 그는 목숨을 놓아버렸다. 급성심근경색과 급성폐부종으로 피를 토하며 전남대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 나는 죽어도 좋아요”

박찬석씨가 지난해 박 열사를 기리며 쓴 글 중에 일부를 인용해본다. 이날 새벽부터 박관현 열사를 찾는 사람들이 전남대병원에 속속 모여들었다. 광주는 이미 박관현 열사의 사망을 알리는 벽보와 현수막이 나붙기 시작했고, 모든 입과 입, 귀와 귀는 진실한 사인에 대한 의문으로 용광로처럼 뜨겁게 들끓었다. 더욱이 “전체 재소자의 처우가 개선될 수 있다면, 어머니 나는 죽어도 좋아요”라는 박관현 열사의 마지막 유언이 전해지면서 사태는 한층 걷잡을 수 없이 되어 갔다.


순식간에 광주는 합의라도 한 듯 일제히 광주의 아들 박관현 열사가 왜 죽었는가, 어떻게 죽었는가를 따지면서 분연히 일어섰으며, 80년 5월을 방불케 하는 시민들의 분노가 광주 전체를 확연하게 휘감았다. 오후 5시경 전남대 부속병원은 입추의 여지가 없을 만큼 시민들과 학생들로 가득 메워졌다. 이들은 열사의 시신을 지키기 위해 기관원의 출입을 통제하는 등 나름대로 자위책을 강구해 나갔다.

그러나 밤 11시가 넘어 영안실을 지키는 사람들이 일시 줄어든 틈을 타 아침부터 병원 봉쇄에 나선 경찰병력이 영안실 문을 부수고 들어와 울부짖으며 저항하는 부모・형제・동료들을 무차별 구타하고 연행하면서 열사의 시신을 빼앗아갔다. 당시 시신을 지키는 사람은 40여 명이었고, 경찰은 사복을 포함하여 600여 명이었다.

자정을 막 넘기가 무섭게 열사는 사체부검이라는 미명하에 부모 형제 하나 참관하지 못한 채 관 속에서 다시 꺼내져 갈기갈기 찢기어졌다. 그리고 곧바로 경찰 앰블런스에 실려 새벽 3시의 칠흑을 가르며 전남 영광군 불갑면 쌍운리 그의 고향집에 돌아오게 되었다.

박관현을 기리는 사람들 줄지어

박 열사는 전남도청에서 최후까지 결사 항전한 윤상원 열사의 대학 후배이자 들불야학 동지였다. 1978년 7월 광천동 천주교회 교리실에서 문 연 광주지역 최초의 노동야학 ‘들불’에 참여했다. 그해 12월 들불야학에서 영어를 맡았던 박 열사는 항상 검정 통고무신에 항상 똑같은 작업복을 입고 거리감없이 어울렸다고 한다.

올해 제32주년 5·18민주화운동기념식과 병행한 박관현 열사 참배가 지난 5월 18일 영광청년회의소(JCI) 주관으로 불갑 박관현 열사비 앞에서 치러졌다. 정기호 영광군수는 “박관현 열사 추모비를 불갑사 관광테마공원으로 이전시켜 영광군민뿐만 아니라 관광객들에게도 그의 애국정신을 널리 알려 계승해 나갈 계획이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5월17일에는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찾아왔다. 김 지사는 1986년 5·3 인천 직선제투쟁을 주도한 혐의로 구속된 뒤 1988년 10개월간 박 열사가 갇혔던 방에서 옥살이를 한 인연이 있고 군사독재 시절 은폐됐던 박관현 열사의 고문과 단식투쟁에 대한 사실을 널리 알려왔다.

지난 9월 11일에는 스콧 와이트먼(Scott Wightman) 주한 영국대사가 국립 5.18민주묘지의 박관현 열사 묘소 앞에서 단식투쟁으로 사망했다는 말을 듣고 안타까워했다. 이렇듯 그를 기리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다.

그리고 10월 5일 박 열사의 모교인 전남대 법과대학 교정 앞 추모비 헌화와 전남대 광주은행 홀에서 학술대회가 열렸다. 이창언 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 연구교수가 ‘한국 민주화와 학생운동’을, 조정관 전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광주민주화 운동과 박관현’을 주제로 각각 발제했다.

이어 같은 날 오후 ‘새벽기관차 박관현 평전’ 출판기념회가 전남대 용봉홀에서 열렸다. 이 평전은 (재)관현장학재단에서 최유정 작가에게 의뢰해 열사의 치열한 삶을 청소년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증보 발간한 것이다.

이제 박관현은 우리 앞에 살아있다. 이 땅의 민주화에 기여한 그의 정신을 우리는 길이 기억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을 다졌다. 그리고 제1차 이날의 근현대역사기행은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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