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여성운동사 15>여성운동을 이끌어 나간 수피아 동문(4)
<광주전남여성운동사 15>여성운동을 이끌어 나간 수피아 동문(4)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2.10.11 09: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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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경찰서 앞 대한독립만세 부르다 ‘김안순’

남구 양림동에 위치한 수피아여고는 수많은 여성 독립운동가와 여성 지도자들을 길러낸 학교다. 비록 작은 동네이지만, 양림 지역은 일제강점기 시절 광주 근대 ‘역사의 박물관’이라고 해도 다름이 없다. 당시 양림리는 광주의 근대적 의식과 문화의 초석이었고, 1919년 3.10만세운동을 비롯한 애국애족운동의 못자리이기도 했다.

그러한 수피아여고에는 잘 알려진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많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아직까지 빛을 발하지 못한 인물 몇 중 故 김안순 선생을 눈여결 볼 수 있다. 평소 표창이나 연금을 거부했었던 그녀는 지난 2009년 광주·전남 독립운동 관련 48명 미공개 재판기록물이 발굴되면서 이름이 거론됐지만 널리 알려지지 않아 아쉬움이 남는다.

3.10만세운동 역사 현장속에서

▲김안순 여사
김안순 여사는 1900년 전남 나주군 본량면 산수리에서 태어나 당시 여성으로써 교육을 받기 힘든 시기인 일제강점기 때 광주 수피아여학교를 나온 이른바 ‘인텔리 여성’이었다. 추악한 일제의 만행에 항거했던 대표적 사건인 1919년 3.1만세 운동이 발생하면서 광주에서도 그 기운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1919년 3월 10일 만세운동 전날. 늦은 밤 학교에서는 소녀들이 기숙사 지하실에서 몰래 태극기를 만들어내고 만발의 준비를 가했다. 당시 학생들과 교사들은 “독립운동을 위해 각자 고종황제 인산날에 입었던 치마를 뜯어 한 사람당 10개씩 태극기를 만들자”라며 날이 뜨기만을 기다렸다.

이윽고 1919년 3월 10일 오후 2시경 작은 장날에 부동교(不動橋) 아래의 작은 장터에서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 농업학교 학생들과 일반주민 1천 500여명이 모여 태극기를 꺼내어 만세운동을 펼치게 됐다.

당시 19세의 꽃다운 나이였던 김안순 여사 역시 독립선언문을 나르는 일을 자처하고 나서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남들과 달랐던 그녀의 주목할 만할 활약상은 홀로 광주경찰서 앞에서 당당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는 점이다.

항일 만세운동 당연한 일

비록 일경에게 바로 체포되어 끌려갈지라도 독립을 갈망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상황에 처하도록 만든 일제에게 직접 들으라는 식으로 겁도 없이 당당하게 맞선 것이다. 결국 광주경찰서 앞에서 만세를 부르다 일경에게 체포되어 광주형무소에서 징역 4월로 옥살이를 하게 됐다.

그러나 생전 그녀는 “조국을 잃은 아픔에 처해있었던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조국을 위해 독립운동을 한 게 무슨 큰일이라고 세상에 밝히느냐”며 그런 사실을 세상에 알리길 꺼려했다고 한다. 표창이나 연금 역시 거부했다.

한편 그녀는 옥고를 치른 후에도 일경의 감시가 계속 되자 ‘김정숙’이라는 이름을 쓰며 평범하게 광주기독병원(당시 제중병원)에서 힘이 다한 그날까지 오직 연고가 없는 환자들을 위해 간병인 역할을 하며 살아왔다. 또한 60세를 넘긴 나이임에 불구하고, ‘간병의 천사’라 불리며 눈코 뜰 새 없이 환자들의 궂은 수발을 도맡아 해왔다.

▲지난 2009년 한 향토학자에 의해 발굴된 광주·전남 3.1만세운동 관련 재판기록물

세 개 이름, 국가 입증 어려워

그러다 그녀는 국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받지 못한 채 지난 1979년 향년 80세의 나이로 작고했지만 지난 2009년 한 향토학자에 의해 발굴된 재판기록물로 인해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됐다.

하지만 김안순 여사의 사망 이후 유족들은 명예 회복을 위해 국가보훈처에 애국지사로 선정해줄 것을 신청했지만, 독립운동 당시 ‘김안순’이었던 이름은 그 이후에 세 번이나 바뀌어 입증하는데 매번 애를 먹었다고 한다.

만세운동 당시 관련된 학생들의 학적부를 일경이 모두 가져가 버렸기 때문에 동일인임을 입증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호적은 김유운, 주민등록은 김서운으로 기재되어 있어, 발견된 재판기록물에 쓰인 ‘김안순’과 일치하다는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그녀의 지문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광주형무소 투옥 당시 찍었던 지문과 주민등록증에 기록된 지문이 일치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지난 2011년 제 92주년 3.2절 기념식에서 3.1 독립운동가임을 인정받아 손자가 대신해 대통령표창장을 수여받게 됐다./김다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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