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박정희가 유효한 까닭(?)
아직도 박정희가 유효한 까닭(?)
  • 이홍길 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 고문
  • 승인 2012.09.13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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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길 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 고문
 영남대는 8월 27일 천마아트센터에서 박정희정책새마을대학원의 2012학년도 1기 입학식을 개최했다. 입학식에는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등 15개 국가에서 온 30명의 외국인과 내국인 2명이 등록했다. 금년은 대통령 선거가 있고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가 여당의 대통령후보가 되고 박정희가 주도한 5.16 군사정변에 대한 논란이 아직 분분한 가운데도 박정희대학원이 출범하는 것을 보니, 볼썽사나운 흉물이 될지 아니면 정치 경제적 한류를 만드는 옥동자를 탄생시킬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박근혜 후보는 기득권 세력의 대표답지 않게 소위 국민 대통합의 유세를 펼치고 있다. 그녀의 대통합이 정치적 수사를 넘어서는 진정성을 갖게 될 것을 바라면서도, 선뜻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하필 이 차제에 박정희새마을대학원을 출범시키느냐 하는 점이다. 물론 대학당국의 처사라 하겠지만 영남대학교에 대한 박 후보의 연고와 영향력은 공지의 사실이 아니던가?

5.16과 박정희의 공과에 대한 사회적 논란이 일시적으로 유보된 가운데 이루어진 박정희대학원의 출범은 논란을 매듭짓는 실천적 답변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박정희를 세계적으로 선양하면서 새마을운동을 박정희의 공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새마을운동이 세계화하여야 할 정도의 사회운동이었던가? 개발도상단계의 국가에 있어서 반대세력을 배제하고 국가권력을 중심으로 사회통합을 이루고자 한 것이 새마을운동의 실질적 모습이었다. 새마을운동에 뒤이은 박근혜를 총재로 한 새마음운동이 뒤따랐던 저간의 사정을 상기해보면, 1930년대 중국의 장개석 정권이 공산당 토벌을 관철해갈 때 사회통제 수단으로 벌렸던 신생활운동을 연상시킨다.

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 1935년 우가키 총독이 시작하고 1936년 이후 미나미 총독이 강화한 황국신민화운동의 아류가 아니었을까? 신민화운동은 심전(心田)개발, 농촌진흥 부인교육과 청결운동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심전개발이 곧 새마음운동이 아니었을까하는 유추가 결코 무리가 아님은 필부라도 상상할 수 있겠다. 본격적인 신민화운동을 펼치기 전 일제는 1932년 가을에 농촌진흥운동을 시작하였다.

진흥운동은 우선 빈곤과 부채를 줄여 농민들의 자립을 장려함으로써 농업공황으로 황폐해진 농촌의 경제상황을 개선하는 것이 목표였다. 아울러 계급투쟁으로 분열된 농촌을 재조직하고 농촌에 대한 국가의 침투력을 높이고자 하는 정치적 목적도 있었다.

이를 위해 반관단체를 만들어 국가와 지방마을과의 접촉을 증대시켰던 것은 훗날의 중앙 지방의 새마을조직의 앞선 모델이라 할 것이다. 진흥운동은 온건한 농본주의자들의 주장과 제안을 수용한 인상을 주면서도 온건주의자와 급진주의자들을 분리시키기도 한 분할통치의 실을 거두기도 하였다. 김준 유달영과 같은 농본주의자들이 ‘잘살아 보세’ 홍보를 솔선했던 것이나 30년대에 이광수의 흙과 심훈의 상록수가 젊은이들의 심금을 울렸던 것이 같은 맥락이었던 것이다.

권력들의 정책적 조작에 놀아날 수밖에 없었던 민초들은 부처님 손바닥의 손오공이었던 것이다. 군부정권 시절을 어둠으로 보지 않고 대한민국의 뼈대와 얼굴과 체질이 형성된 시기로 보고 그 시절의 에너지와 역동성을 폭발시킨 인물이 박정희라는 주장도 있다. 그 시절에 보통 사람들도 각가지 수준의 개인적 성취를 이룩하게 된다.

그것은 비록 보편적 가치지향과 무연하더라도 각가지 수준의 개인적 성취를 들어내게 되어 자신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게 하였다. 이제 많은 사람들은 엽전을 면하고 스스로 나르시즘이 가능하고 위신 있는 존재들이 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 시대의 중심에선 박정희가 비명횡사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성공적인 대통령이 된 아이러니가 생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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