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여성운동사12>여성운동을 이끌어 나간 수피아 동문(1)
<광주전남여성운동사12>여성운동을 이끌어 나간 수피아 동문(1)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2.09.06 09: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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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흘린 왼팔이 여선생 ‘윤혈녀’

▲광주 수피아여자고등학교에 윛이한 광주 3.1만세운동 기념동상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유교사상의 영향으로 정숙하고 조신한 여성상을 그려왔다. 하지만 1900년대 초 여성도 신교육을 접하게 되면서 지식을 쌓으면서 일제의 만행에 대해 남성 못지않게 목소리를 내오게 됐다. 의향의 ‘광주’에서도 여성들이 참여했던 3.10 만세운동은 빼놓을 수 없는 여성운동사다.

광주에서도 선교활동으로 1908년 수피아 여학교가 설립되면서, 이곳을 거쳐 간 여럿 여성 독립 운동가를 찾아낼 수가 있었다. 지난 2008년에는 개교 100년을 맞이한 수피아여자고등학교가 이를 기념하기 위해 수피아 백년사를 편찬했다.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수피아여자고등학교는 정문에서부터 1900년대 초 독립운동을 펼쳐왔던 여성들의 미묘한 기운마저 감돈다. 수피아의 대표적으로 유명한 소심당 조아라 선생이 있지만 널리 알려지지 않아 소리 없이 사라져버린 여성 독립 운동가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어렵고 외로웠던 어린 시절

▲독립운동을 펼치다 일본 헌병대에 왼팔을 잘린 윤형숙(윤혈녀) 열사
3.1운동하면 누구나 유관순을 떠올리지만 그와 비견할 수 있는 광주 여성운동가 윤형숙(윤혈녀) 열사가 있다. 참혹했던 일제강점기를 지내오면서 독립운동으로 불구의 몸이 된 그녀는 50세의 나이로 외롭게 세상을 뜨게 되었다.

그녀는 1900년 9월 13일 전남 여천군 화양면 창무리 4통 5호 한학이 깊은 윤치운씨의 3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녀는 생모와 사별을 하고 가난에 처한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외롭고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평소 인물도 좋고 부지런하면서 영리했던 윤 열사는 친척의 소개로 순천 매곡동의 남장로교 미국인 선교사 가정에 식모로 들여보내졌다. 당시 선교사의 도움으로 그녀는 순천 매산 성서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1918년 광주 수피아여학교에 진학하게 됐다. 그녀는 열심히 공부하여 반장을 도맡았다.

‘대한독립만세’ 도중 왼팔 잘려

그러던 1919년 3월 1일. 역사의 한 획을 그었던 일제에 항거한 3.1운동이 발생하면서 광주에서도 같은 해 3.10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당시 그녀는 수피아여학교 2학년이었다. 윤 열사는 겁도 없이 학생들을 이끌고군중 맨 앞에서 ‘만만세’를 외쳤다.

또한 윤 열사는 광주읍 청사 앞에서 ‘독립선언문’와 ‘경고 아이천만동포(警告 我二千万同胞)’라는 글을 나눠주며 선두에서 나서 선언문을 낭독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를 보고 일본 헌병대들은 총을 쏘며 해산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에 동요 없이 윤 열사는 굴복하지 않았다. 그때 일본 기마헌병이 매서운 칼을 휘둘리며 태극기를 휘날리는 그녀에게 돌진했다. 그 순간 그녀의 왼쪽 팔이 땅바닥에 나뒹굴러졌다. 잔악무도한 일본 헌병이 군도(軍刀)로 그녀의 왼팔 상단부를 잘라 버린 것.

그녀는 피가 철철 흐르는 참변을 당하고도 남은 오른팔로 태극기를 다시 집어 들어 더욱 맹렬하게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다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응급치료를 받고서 그녀는 일제의 취조를 받게 됐다. 그녀는 “너의 조정한 배후가 누구더냐 너의 이름이 뭐냐”라는 일제의 취조에 오기가 나고 분통이 터져 “나는 보다시피 피 흘리는 윤혈녀다”라고 대답했다.

왼팔을 잃은 윤형숙의 이명(異名)인 윤혈녀는 어릴 때 ‘피를 많이 흘려서’ 따라 붙게 된 이름이었다. 이후 ‘생도 윤혈녀’는 1919년 4월 30일 일본 보안법 위반으로 광주 지방법원에서 징역 4개월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러한 옥살이의 고난 끝에 결국 오른쪽 눈도 시력을 잃고 말았다.

▲50세의 짦은 생을 마감한 윤혈녀 열사는 주변 기독교인 도움으로 시신을 거두어 고향 여수시 화양면 창무리에 잠들게 됐다 @사진 출처 여수지역사회연구소
50세 나이로 외로운 생을 마감

출옥 후 왼팔이 외눈박이 그녀는 4년간 격리수용조치로 탄압을 받고 1927년 요양 차 전북에서 기독교학교 사감으로 재직하며, 고창에서는 유치원 교사로 봉사활동을 펼쳤다. 1939년 이후에는 고향인 여수로 내려가 청년들을 대상으로 문맹퇴치와 항일 애국의식 함양에 앞장섰으며 ‘외팔이 여선생님’이라 불렸다.

이윽고 기다리던 1945년 해방을 맞았다. 외팔이 그녀는 태극기를 그려서 거리로 나와 나누어 주고 해방의 기쁨도 잠시 곧이어 불행이 닥쳤다. 1950년 6.25전쟁으로 북한군이 여수를 점령하고 불순분자 색출 령을 내려 내무서원에게 잡혀 투옥을 하게 된 것.

얼마 안 돼 1950년 9월 28일 수도가 수복되자 북한군들은 후퇴를 하면서 그녀와 함께 잡혔던 기독교인들을 총으로 피살했다. 그녀는 결혼을 하지 않아 슬하에 자녀가 없었다고 한다. 결국 마지막까지 그녀는 향년 50세로 외로운 생을 마감하게 됐다.

외로이 여성의 몸으로 독립운동을 펼쳐왔던 윤 열사는 주변 기독교 지인들의 증언에 힘입어 2004년 8월 15일에서야 비로소 독립유공자 건국포장이 추서됐다. 또한 올해에는 3.1절을 기념하여 여수시 화양면 창무리에 잠들었던 윤 열사의 묘에서 첫 추념식을 개최했다./김다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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