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를 보는 어긋난 시각들
현대사를 보는 어긋난 시각들
  • 이홍길 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 고문
  • 승인 2012.08.30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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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길 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 고문
삶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이 살아온 시대를 다르게 본다고 나무랄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 시각과 인식이 개인적이 아니고 함께 공유해야 할 시각이라면 보편성을 갖추어야 하고, 역사적 인식이 되려면 사실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현실을 사는 사람들은 현실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면서 그 의견에 힘을 싣는 방법으로 여러 가지 평가를 곁들인다.

근래 많은 사람들에 의해 회자되는 박정희 이야기가 그 두드러진 사례이다. 그의 딸이 유력한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는 점만이 아니라 21세기 한국의 발전지향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 하는 것을 둘러싸고 보수 세력과 개혁 세력의 드잡이의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독재자 이승만과 박정희는 국립묘지에서 추방해야 한다’는 책을 쓴 김만식은 우리 민족과 국가가 살아온 역사를 돌아보고 그 방향을 깨닫는 역사의식이 중요함을 역설하면서 그 아버지에 그 딸임을 명심할 것을 당부한다.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과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을 지낸 한상범은 민주공화주의의 애국충성은 자유를 위한 조국애이며 동포형제에 대한 애착과 봉사인데, 박정희는 지배자에게 절대복종하는 봉건적 충성과 연장자를 무조건 섬기는 봉건적 미덕을 강조했다. 그의 주변은 만주를 무대로 친일 매국행각을 한 무리들이 주류를 이루었다고 지적하였다.

일본의 식민지배와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가설들을 받아들여 일본의 한국지배는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하였다는 주장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일본의 식민지배는 역사적 사실이었다. 우리들의 민족주의적 자부심은 식민주의는 우리들의 진정한 근대성 건설을 방해했다고 보지만, 근대적 지배의 특징은 정치 경제영역만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까지 침투한다.

지배에 대한 다양한 사회계층의 동의를 만들어냈던 일본 식민주의의 교활함과 악랄함은 상당한 성과를 획득하지 않았을까? 1920년 이후의 문화정치부터 1930년 후반 전시동원기 이전까지 한국사회 내에 혁명적 열기를 해소하고 개량주의자들을 북돋고 유인하는 결과들을 가져오지는 않았을까를 유추해본다. 내선일체와 창씨개명과 같은 시도들은 식민 헤게모니에 대한 자신감의 표출일 수 있겠다. 1930년대에 해방과 광복에 대한 희망을, 민중의 수준에서 얼마나 갖고 있었는지도 가늠해 볼 일이다.

일본 통치의 헤게모니가 관철되는 가운데 조선인의 주류세력은 어떤 세력이었을까?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은 단속대상이었다. 식민당국과 이에 기생하는 조선인 주류세력은 노·농 운동에 반대한다는 점에서 이해관계가 일치한다. 그런데 종전과 함께 조선인 주류세력은 그 위신의 원천인 식민 권력을 상실하게 되고 하루아침에 부일세력이라는 부정적 세력으로 추락하게 된다.

지주와 자본가들인 조선인 주류세력들은 집단 멘붕이 가능한 현실을 만나게 되었다. 이들의 생존과 위신 파탄을 부조한 것이 미군정 당국이고 이승만이었다. 무조건 뭉쳐야 산다는 이승만의 주장은 복음이었고 한민당은 주류세력의 자구 노력이었다. 미 군정과 이승만 정권을 통하여 친일 주류세력은 그 세력을 강화하였지만 식민 근대화의 궤도를 일탈한 자유당 통치 시기의 부패 무능을 경험하게 되고 그 결말은 4·19에 의한 지배권의 위기를 맞게 된다.

식민권력에 익숙하지 못한 장면의 신파정권은 군부 쿠데타로 붕괴하고 일본 군국주의의 순정세력이 등장함으로써 친일세력이 부흥하게 되었다. 시각의 엇갈림은 지향의 엇갈림으로 계속되는 데에 우리들의 고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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