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이야기 44.김구선생의 피난처 해염(海鹽)
중국 이야기 44.김구선생의 피난처 해염(海鹽)
  • 강원구 한중문화교류회 회장
  • 승인 2012.08.27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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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구 박사
중국의 해염은 김구 선생의 피난처로 잘 알려져 있다. 이곳에서 처녀 뱃사공 주애보를 만나 사랑을 나눴다는 이야기도 들리는 곳이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후 배후세력인 김구 선생에 거금 60만원을 내걸고 검거에 혈안이 되었다.

김구 선생은 몸을 숨겨야 했는데 미국인 피치 박사의 집에 잠시 머물렀는데 안전을 담보할 수 없었다. 5월 상해를 탈출해 처음 도착한 곳이 가흥의 수륜사창(水綸紗廠)이었다. 당시 상해대학 법과대학 학장이며 사회활동가이었던 저보성(褚輔成)의 도움으로 장진구라는 이름으로 숨어있었다.

그러나 이곳도 일제가 수소문하고 다니자 다시 피난처를 모색했다. 가흥에서 영파 쪽으로 고속도로 30km 달리면 김구 선생이 피난을 했던 해염의 남북호에 있는 ‘재청별서(載靑別墅)’가 나온다. 별서란 별장을 말하는데 해염현에서 한글로 ‘재청별장’이라 써 있다. 이곳에 김구선생의 기념관이 다른 지역의 임시정부와 같이 잘 꾸며져 있다.

이곳은 저보성의 며느리 주가예의 친정집이며, 더운 여름에 김구선생을 모시고 왔던 곳이다. 재청별서에서 창문을 열면 남북호가 보인다. 이곳으로 몸을 옮겼으나 서툰 중국말과 ‘남자 홀몸’이라는 게 몸을 숨기기엔 좋지 않은 여건이었다.

저보성의 아들 저봉장은 신분위장 안안으로 결혼을 제안했고 김구선생은 처녀 뱃사공 주애보를 만난다. 주애보에 대한 내용은 중국의 여류 작가 하련생이 백범 김구선생과 중국 처녀 뱃사공의 사랑을 그린 소설 선월(船月)이 있다.

당시 백범은 57세, 주애보는 20세로 두 사람이 정식 결혼식을 올린 것은 아니지만 선상(船上)에서 두 사람이 5년간의 동거생활을 시작했다. ‘사실상 부부’였고 백범 역시 그런 감정을 느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해염에 또 다른 인연은 최부 선생의 표해록에 있다. 해염 출신 장녕(張寧)이 1460년 조선에 사신으로 왔다간 사람이다. 장녕은 조선 선비가 표류해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100리가 넘은 항주에서 기다렸다. 그러나 나이는 많고 언제 올지 몰라 조카를 남겨두고, 만일 조선 선비가 오면 ‘장녕을 아는가’ 물어보라고 하였다.

최부 선생이 항주에 도착하자 그의 조카가 “명나라 사신으로 장녕이란 분이 있었는데, 조선에 가서 황화집(皇華集)을 지었다고 하는데, 당신은 알고 있소?” 라고 말하자 최부 선생은 “등한강루라는 시를 지었는데, 내용은 이렇습니다.”

등한강루(登漢江樓) 한강루에 올라

동국에 높은 누각이 있는데,
앞에는 한강 물이 흐르고 있구나.
햇빛은 청작방에 어른거리고,
그림자는 백구주에 떨어지네.
멀리 하늘 끝을 바라보니,
허공에 있어 땅에 뜨려고 하네.
여덟 창으로 바람과 햇빛이 좋은데,
대접이 너무 좋아 다시 머무르고 싶네.

東國有高樓 樓前漢水流 光搖靑雀舫 影落白鷗洲
望遠天疑盡 凌虛地欲浮 八窓風日好 下榻重淹留

이 시를 내려쓰자, 옆에 있던 관리들이 놀란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 때부터 최부선생을 융숭한 대접을 받았으며, 항주에서 북경까지 경항대운하를 따라 간 최초의 한국인이 되었다.
해염은 시가지 형성이 잘되어 있지만 아직 시로 승격되지 않았다. 시내에 ‘기원(綺園)’이라는 정원이 있다. 중국에 워낙 좋은 정원이 많기 때문에 이름이 나지는 않았지만, 우리나라에 있다면 대단히 아름다울 것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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