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야기 43. 임시정부가 있는 가흥(嘉興)
중국이야기 43. 임시정부가 있는 가흥(嘉興)
  • 강원구 한중문화교류회 회장
  • 승인 2012.08.16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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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구 박사
상해에서 항주로 가는 중간에 가흥이 있다. 소주에서 항주에 갈 때도 가흥을 거친다. 이곳 가흥은 우리 임시정부가 있었던 곳이다. 그래서 요즘 관광객 인구가 늘고 있다. 시내 매만가에 임시정부와 임정요인들이 피난하며 묵었던 곳이 있다. 매만가 입구에 매화나무가 서 있다.

가흥시 정부에서 한국관광객을 위해 매만가를 아주 깨끗하고, 잘 정돈해 놓았다. 가흥의 임시정부는 상해, 항주에 이어 세 번째 임시정부 터이다. 그래서 우리에겐 의미가 있는 도시이다.
가흥은 ‘물의 도시’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이곳 평원을 타고 흐르는 대운하는 양자강 삼각주로 합류한다. 강과 운하는 이곳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배를 띄워 놓고 물 위에서 사는 사람들이 수만 명에 달했다.
 
상해의 항일구원회 회장 저보성(楮輔成)은 자신과 가족의 위험을 무릅쓰고 백범 김구 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과 그 가족들을 자신의 고향인 가흥으로 피신시켰다. 백범은 가흥에서 피신하는 동안 저보성 일가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여러 차례 거주지를 옮기며 피살의 위기를 넘겼다.

김구 피난처는 저보성의 양아들인 진동생의 집이었다. 집은 가흥의 운하와 바로 연결되어 있는데, 여기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집 뒤에 항상 조그만 배를 대기시켜 두었다고 한다. 저보성의 장남 저봉장은 중국의 해군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에 유학한 후 귀국, 가흥과 항주에서 종이공장을 경영한 인물이었다.

1932년 여름, 가흥역에 일제 밀정들의 탐문이 시작되자 저보성은 백범의 안전을 위해 피신처를 며느리 주가예의 친정 별장으로 옮기게 했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이때 주가예는 하이힐을 신고 산 넘고 물 건너 백범을 직접 친정의 별장까지 안내했다.

1933년 여름 매만가로 돌아올 무렵 백범의 신분이 외부에 알려지자 처녀 뱃사공인 주애보(朱愛寶)에게 이미 상처한 백범을 뒷바라지하게 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당시의 생활에 대해 “오늘은 남문 밖 호숫가에서 자고, 내일은 북문 밖 운하에서 잤다”고 기술했다. 백범은 1936년 주애보와 남경에서 헤어졌다.
백범일지에서 그는 “나에 대한 공로가 작지 않은데, 내가 뒷날을 기약할 수 있을 줄 알고 돈으로 넉넉히 돕지 못한 것이 유감이다”라고 회고했다. 그때 백범이 주애보 여사에게 준 돈은 100원이었다.

남호(南湖)는 시내 남쪽에 있으며, 중국공산당이 회의를 하였는데, 우리 임시정부 관계자들도 배를 타고 회의를 한 곳이다. 호수 입구에는 중국공산당 제1차대회 기념관이 있고, 중앙에는 연우루(煙雨樓)라는 누각이 있다. 건륭황제가 이 이름을 따 승덕의 피서산장에 연우루를 만들었다고 전한다.

호수 주변은 작지만 가흥 시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원이다. 저녁에는 야경이 아름다운 곳이다. 한국인들이 많이 거주한 곳은 우의로(友誼路)로 한국 식당들이 몰려 있다. 지난 2008년 필자도 이곳에 나무를 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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