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여성운동사10>광주의 유관순, 최현숙 독립투사(1)
<광주전남여성운동사10>광주의 유관순, 최현숙 독립투사(1)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2.08.14 18: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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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만세운동의 ‘최연소’ 독립투사

▲故 최현숙 독립운동가
일제치하 1919년 3월 1일 당시 여성의 몸으로 독립운동에 몸을 담갔던 유관순이 있다면 빛고을에는 ‘광주의 유관순’이라고 불리는 여성 독립운동투사 최현숙 선생이 있다.

최 선생은 선구적인 여성으로 일찍이 독립운동과 농촌 계몽에 젊음을 바쳤으며, 폭악한 일제의 총검에 항거하여 오직 조국광복을 위하여 몸을 바쳐왔던 여성운동가다. 그녀는 3·1운동에 가담한 16세의 최연소 독립운동가로 옥살이를 지냈으며, 광주 최초의 여성언론인이라는 점에 그녀의 인생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애국지사 최현숙 선생에 대해 조사하기 위해 남구 제석산 생태탐방로 문성고 정문 맞은편 입구에 위치한 ‘애국지사추모동산’에 찾아가 보았다. 뜨거운 날씨에 경건한 추모 동산은 최 선생의 보이지 않은 뜨거운 애국정신으로 주변을 휘감는다.

어린 시절, 독립의지 ‘성숙’

최현숙 선생의 일생은 독립운동을 빼놓고 말할 수 가 없다. 그녀는 1904년 1월 27일 전남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남구 양림동)에서 과수원을 하는 부잣집 막둥이 외동딸로 태어났다.

당시 여성의 교육이 중시되지 않았던 때. 그녀는 부모님을 설득하여 10살의 나이로 수피아 여학교 보통과에 입학하고 4년을 마친 후, 다시 수피아 여학교 고등과를 진학하게 될 만큼 총명하고 영특했다. 1920년 수피아 여학교 고등과 제 6회 졸업생이었던 그녀는 이에 그치지 않고 서울 정신여학교의 진학에까지 이르는 계몽의식이 남달랐다.

그녀가 고등과 3년 재학 당시 3·1운동이 발생했다. 체격이 남들보다 성숙했던 그녀는 어린 나이임에 불구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렬을 선도했다. 광주에서는 3월 10일 봉기를 하기로 있던 터라 밤을 세워가며 태극기를 그리기 시작했다.

시위 당일. 그녀는 결단의 준비를 철두철미하게 했다. 머리를 땋고 치마끈을 단단히 매고 짚신을 신은 채 시위진열에 섰다. 이날 오후 2시부터 수피아 여학교에서 광주시장까지 가면서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 만세’를 불렀다.

▲1924년 최현숙 선생이 다녔던 서울 정신여학교 졸업식 사진.(최현숙 선생은 아랫줄 왼쪽 다섯번째)

최연소 나이 투옥, 그리고 후유증

많은 군중도 그녀를 따라 독립만세를 외쳐줬고 결국 일본 헌병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날 수피아 여학교 선생 박애순 및 진신애와 함께 시위를 했지만 나이에 비해 키가 컸던 그녀는 이들과 함께 제일 먼저 감옥으로 끌려가게 됐다.

한국여성독립운동사 3·1여성운동지회 편에서 최 선생은 “그때 당시에는 나라를 되찾겠다는 불타는 마음으로 만세를 불렀었지. 하지만 얼마 안 돼 일경에게 체포되고 제일먼저 잡아가더라구. 남들보다 키가 좀 컸던 것이 죄였지. 머리에 끈을 두르고 짚신을 신은 채 학교 앞에서 광주시장까지 만세를 부르는데 일본 경찰이 제일 먼저 잡아 가더라”고 회고한다.

또한 최 선생은 “체포되고 모두들 취조를 받게 됐어. 일경은 만세를 부르게 한 주동 인물이 누구냐? 라고 모두에게 물었지만 그때 나는 겁도 없이 주동자는 바로 나다! 라고 말하고 동료들과 선생님을 지키려 했지”라고 회고한다.

그리하여 16세의 어린 나이였지만 징역 4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아 갖은 고초를 겪고 미결구금으로 50일간을 투옥하게 됐다. 최 선생은 투옥당시 일경에게 무수한 매와 두부 15cm정도의 심각한 상처를 입어 그 후유증으로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 끈을 매고 지내지 않으면 안 되게 됐다고 한다.

▲3.1만세운동으로 투옥되었던 수피아 학생들이 출옥 후 기념촬영을 했다. (최현숙 선생은 아랫줄 오른쪽 두번째)

‘여성 계몽운동’ 앞장서

이렇게 감옥에서 징역을 살다 어린나이라는 이유로 풀려나게 된 최 선생은 집으로 곧장 향하게 됐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 여성으로써 옥살이를 했다는 기록 때문에 걱정을 했지만 오히려 부모님들은 “아이고~ 우리 막둥이가 늦게 나서 애지중지 키웠는데 참 장한 일을 했어”라며 동네 사람들에게까지 자랑하였다고 한다.

이후 감옥을 나와서도 그녀의 신여성으로써 학구열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1921년 서울 정신여학교에 진학하여 흥학관에서 야학을 가르치는 등 독립운동을 하던 당시의 정열을 주민계몽 사업으로 옮겨나갔다.

그녀는 신여성의 길로 걸어가면서 “나라를 잃은 것은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야”라고 생각하며, 방학이 되면 광주로 내려와 후배양성, 문맹퇴치 등 농촌을 계몽하기 위해 앞장섰다.

정신학교 수석 졸업이후에는 광주 수피아 여학교와 호남보통학교, 북문 밖 교회부속 유치원에서 교사생활을 해나갔다. 여기에 주목할 점은 광주의 대표적 여성운동가로 알려진 소심당 ‘조아라 선생’(본지 제577호 9면)의 언니인 조화임 여사 같은 분이 최 선생의 제자들이었다.

이렇듯 최연소 나이에 만세운동을 펼쳐 ‘광주의 유관순’ 최현숙 선생은 어린나이부터 독립운동의 강인한 투지력을 보이며, 조선 독립을 위해서 문맹을 퇴치하고 민중을 계몽하기 위해 앞장서왔다./김다이 기자

▲북문 밖 교회부속 유치원(중앙 유치원)에서 교사로 봉사활동을 했던 최현숙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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